김광규 시인 "쉽게 읽히지만 쉽게 쓴 적은 한 번도 없죠"

입력 2018-01-25 08:23   수정 2018-01-25 09:23

김광규 시인 "쉽게 읽히지만 쉽게 쓴 적은 한 번도 없죠"
"시공 초월해 읽히는 건 보편성 덕분일 것"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언제나 안개가 짙은/안개의 나라에는/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김광규(77) 시인의 시 '안개의 나라'는 군부 독재 시대의 암울한 풍경을 은유한 시다.
"군부 독재 시대에는 다방에서도 말을 잘못하면 붙들려 갔죠. 외부 세계의 소식이 차단되고 뉴스위크나 미국 잡지 같은 것들도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은 찢겨서 들어왔어요. 아주 짙은 안개의 나라에서 살았던 거죠. 하지만 오늘날에도 우리가 이런 안개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최근 희수(喜壽) 기념 시선집 '안개의 나라'(문학과지성사)를 출간하고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김광규 시인은 '안개의 나라'를 쓸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안개의 나라'는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시임에도 해외 10여 개국에 번역돼 찬사를 받았으며, 몇 년 전에는 영국 BBC 방송의 시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의 시는 일상에서 길어 올린 담백한 언어로 쓰였지만, 인간과 사회에 관한 심오한 사유를 담아 시공을 초월해 폭넓은 독자에게 받아들여진다.
"이 시를 낭독하면 세계 어디서든 환영을 받아요. 보편성이 있다는 얘기겠죠. 내 시를 비평가들은 '일상 시'라고 별명을 붙이는데, 무슨 거룩하고 추상적인 데서 나온 게 없어서 그렇죠. 초등학생이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예요. 하지만 시에 담긴 의미는 양파 껍질처럼 까 들어갈수록 더 깊은 것이 나타난다고들 합니다. 그런 맛이 있어서인지 지금 읽어도 옛날이야기란 생각이 안 든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내 시집이 베스트셀러는 못 됐지만, 스테디셀러이긴 해요.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은 아직도 팔리는지 여전히 인세가 들어와요."
국내에서는 4·19 세대의 몰락을 노래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가장 유명하지만, 해외에서는 그의 여러 작품이 애송되고 있다. '어느 돌의 태어남'은 영문('The Birth Of A Stone')으로 번역돼 1990년대 초 영국 런던에서 출간됐는데, 시집이 미국에도 퍼지면서 일리노이주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길도 없이 가파른 비탈/늙은 소나무 밑에/돌이 있었다/이끼가 두둑이 덮인/이 돌은 도대체 얼마나/오랫동안/여기에/있었을까//2천 년일까 2만 년일까 2억 년일까//아니다/그렇지 않다/지금까지 아무도/본 적이 없다면 이 돌은/지금부터/여기에/있다//내가 처음 본 순간/이 돌은 비로소/태어난 것이다" ('어느 돌의 태어남' 중)



이번 시선집에 담긴 시는 224편이다. 지난 40여 년간 펴낸 11권의 시집, 800여 편 중 특히 아끼는 작품을 어렵게 추린 것이다. 시대순으로 수록해 앞부분의 시들은 1970∼80년대에 쓴 것들이지만, 지금의 젊은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약자의 아픔을 공감한 '목발이 김 씨'(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 수록, 1983) 같은 시는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지하 5층/지상 30층/연건평 35,000평/서울빌딩 기초 공사 때/김 씨는 막일을 했다/현기증 나는 비계를 오르내리며/자갈을 져 나르고/미장을 돕고/타일을 붙이고/창틀을 달았다/서울빌딩 주춧돌 밑에는/김 씨의 고된 인생이 3년쯤/깔려 있고/하늘로 꼬여 올라간/아찔한 비상계단 어디엔가/김 씨의 잃어버린 왼쪽 다리/걸려 있다//(중략)//발을 헛딛고/추락했던 그 자리/13층 비상계단 입구는/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오직 그것이 보고 싶어 김 씨는/다리를 절룩이며/옛날의 일터를 찾아갔다/용접공 이 씨를 만나면/반가워 낮술 한잔/꺾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서울빌딩 현관 앞에서/넥타이를 맨 수위가/그를 가로막았다/일 없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고" ('목발이 김 씨' 중)
최근작 '오른손이 아픈 날'(2016)에 실린 '쪽방 할머니'는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가 노인 빈곤 문제를 얘기하며 소개해 회자하기도 했다.
"가난에 찌들어 눈빛도 바랬고/온 얼굴 가득 주름살 오글쪼글/지하철 공짜로 타는 것 말고는/늙어서 받은 것 아무것도 없네/견딜 수 없이 무더운 한여름이나/한강이 얼어붙는 한겨울이면/홀로 사는 지하실 구석방을 나와/지하철 노약자석에서 하루를/보내는 쪽방 할머니/땅에서 태어나 땅속으로 돌아다니는/우리의 외로운 조상" ('쪽방 할머니' 중)



"내 기준은 보통 사람들이에요. 문학 비평가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쉽게 쓰려고 하지만, 쓰고 나서도 수없이 고칩니다. 한 편도 쉽게 쓴 시는 없어요. 다 어렵게 썼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상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후배들 가운데 '김광규 스타일'을 흉내 내보려고 한 친구들이 있는데 많이들 실패했다고 해요. 이런 것은 원칙적으로 배우거나 가르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쓰고 또 쓰면서 거기에 이르러야지."
'희망' 같은 시에는 인류의 역사를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다.
"희망은 결코 절망한/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희망을 잃지 않은/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중략)/그렇다 절망의 시간에도/희망은 언제나 앞에 있는 것/어디선가 이리로 오는 것이 아니라/누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싸워서 얻고 지켜야 할/희망은/절대로/외래어가 아니다" ('희망' 중)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와 한양대 독문과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은 그는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온 문인·평론가 집단과는 거리가 있다. 직속 후배나 제자들이 문단에 없다 보니 올해 희수를 맞았음에도 별다른 기념행사 없이 시선집만 조용히 나왔다.
"나 자신이 누구를 쫓아다니며 사사하거나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후배나 제자가 있다 해도 해줄 수 있는 말은 '문학은 혼자 하는 거다'라는 말뿐이에요. 그러니 내게서 시를 배우겠다고 할 사람이 없겠죠(웃음)."
여전히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집에 있는 아무 종이나 잡고 재빨리 메모해 놓는다는 그는 "그동안 대략 4년 주기로 시집을 내왔는데, 다음(열두 번째) 시집까지는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며 웃었다.
그는 지난해 말 심장이 좋지 않아 심장박동기를 다는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희수(77세)를 맞은 감회를 묻자 "고등학교 동창 500명 중 120명이 죽었다. 내 경험으로 봐선 70이 넘으면 급격히 노쇠해지는 것 같다"며 "누군가 찾아오고 (내 죽음을) 아쉬워할 때 죽는 게 좋은 것 같다"고 했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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