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허한 눈으로 본 아름다운 세계…허형만·최두석 시집

입력 2018-01-26 07:30   수정 2018-01-26 11:00

겸허한 눈으로 본 아름다운 세계…허형만·최두석 시집
'황홀'·'숨살이꽃' 나란히 출간…자연·생명의 가치 노래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오랜 시력(詩歷)을 지닌 두 시인이 겨울의 끝자락에 서정성 가득한 시집을 나란히 내놔 추위에 언 독자들의 마음을 조금은 녹일 듯하다.
'비 잠시 그친 뒤', '영혼의 눈', '그늘이라는 말' 등 시집을 낸 원로 시인 허형만(73)이 열여섯 번째 시집 '황홀'(민음사)을 펴냈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77편의 시는 삶과 인간, 자연을 겸허한 눈으로 바라보며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는 시인의 넉넉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시 안에 넘실대는 따뜻한 빛이 읽는 사람의 마음마저 훈훈하게 한다.
시집 앞부분에 실린 '번짐과 스밈', '황홀'은 그런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번지는 것과 스미는 것은 차이가 있을까요?//유치원 앞을 꺾어 돌 때/아직 아이들이 등원하기에는 이른 시각/보랏빛 나팔꽃이 먼저 도착했습니다./아이들이 깔깔깔 유치원에 들어서면/나팔꽃은 환한 얼굴로 반길 것입니다./조금 뒤에 도착해 문 앞에 서 계시던 하느님도/아이들과 나팔꽃을 배경으로 셀프 카메라를 찍으시겠지요.//번지는 것과 스미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없을 겁니다." ('번짐과 스밈' 전문)
"세상의 풍경은 모두 황홀하다/햇살이 노랗게 물든 유채꽃밭이며/유채꽃 속에 온몸을 들이미는 벌들까지/황홀하다 더불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내게 다가가는 사람이나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모두/미치게 황홀하다 때로는 눈빛이 마주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오, 황홀한 세상이여 황홀한 세상의 풍경이여 심장 뜨거운 은총이여" ('황홀' 전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 보이는 시도 있다.
"온몸에는 별들이 쉬었다 간 자국/바람이 강렬하게 포옹했던 체온으로 가득한/겨울 자작나무 숲//우듬지로부터 가지와 가지 사이/서서히 흘러내리는 불꽃 같은 빛을 따라/이파리에 매달린 애벌레가 일광욕을 즐기고/참새 떼는 빛을 쪼며 흥겨워하고//눈처럼 흰 생명의 빛으로/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추위를 견디는/겨울 자작나무 숲" ('겨울 자작나무 숲' 전문)
시립 요양 병원의 풍경에 노년의 슬픔을 그린 '낯선 풍경', 사랑하는 아들들을 생각하며 쓴 '구파발역'과 '촛불' 같은 시도 좋다.
시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시 정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시인이 다루는 언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생명체다. 이처럼 깨끗하게 숨 쉬는 생명을 '낯설게하기'라는 이름으로 이리 비틀고 저리 비트는 잔혹한 일을 나는 할 줄 모른다. 선천적인 태생이 촌놈이라서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순도 높은 언어 그 본질 자체를 시의 용광로에서 달구고자 한다. 마침내 황홀하게 빛을 발하는 언어의 숨결을 상상하면서."



'성에꽃', '투구꽃' 등 꽃 이름을 딴 시집으로 유명한 최두석(63) 시인도 일곱 번째 시집 '숨살이꽃'(문학과지성사)을 내놨다.
그동안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는 생명의 꽃을 형상화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 담긴 66편의 시에서 이 땅에 뿌리내려 숨 쉬고 살아가는 꽃, 생명, 작은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특히 숨 쉬는 모든 존재의 숙명인 '먹는' 행위를 성찰하며 우리의 입으로 들어오는 자연 식재료들의 소중함, 우리의 음식이기 이전에 그것이 본래 잉태하고 있던 생명의 가치를 일깨운다.
"멸치야 갈치야 날 살려라/너는 죽고 나는 살자/에야 술배야/가거도 어부들의 고기 잡는 소리를/밥상머리에서 환청으로 듣곤 한다//(중략)//그토록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소화가 되겠느냐 핀잔하는 이 있겠지만/나는 오히려 그이에게 권하고 싶다/술배소리 음미하며 한 끼 먹어보라고/그래야 음식마다 맛이 새롭고/먹고사는 일이 더욱 생생하게 소중해지므로." ('술배소리' 중)
세상을 대하는 시인의 낙천성과 유머를 만날 때면 슬며시 웃음 짓게 된다.
"자극을 피하는/절집의 수행과는 거꾸로 가는 줄 알면서도/마늘 없는 밥상은/터무니없이 허전하다//아무래도 나는 마늘 중독자다/마늘 먹고 사람이 된/웅녀의 까마득한 후손이다." ('마늘' 중)
"바야흐로 단풍 드는 산길 걷다가/톡 토독/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들으면/귀가 환해진다/어떤 새로운 길이 열리는 음악처럼//산길에 구르는 토실한 도토리 보면/적당한 빈터 찾아 슬쩍 묻어준다/눈 밝은 다람쥐가 찾아 먹기도 하겠지만/운 좋은 도토리는 싹이 돋아/우람한 참나무로 자라기를 기원하면서//'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스피노자의 말인데/'내일 세상을 뜨더라도/오늘 도토리를 심겠다'는/거둘 곡식도 과일도 없이/가을을 사는 나의 말이다." ('도토리를 심으리랏다' 전문)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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