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끼리 살상전 벌인 독립운동사 최대 비극 현장…"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
사건 발생 96년 만인 작년 6월 추모비 제막…비석 앞엔 누군가 두고간 꽃다발
(스보보드니<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러시아 아무르주의 스보보드니 외곽 소벳스키 마을. 도로에서 30여m 들어간 공터에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오석(烏石) 빗돌이 서 있다.
앞면 왼쪽에는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이란 문구가 한글로 쓰여 있고 가운데와 오른쪽엔 한자와 아라비아 숫자로 '西歷(서력) 1921. 06. 28'과 '黑江(흑강) 自由市事件(자유시사건) 獨立軍殉絶地(독립군순절지)'라고 각각 새겨놓았다. 아래쪽에는 러시아어로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 빨치산 잠들다'라고 적었다.
비석에 적힌 대로 이 지역 인근에서는 우리나라 독립군끼리 살상전을 벌여 숱한 희생자를 낳았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가운데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이다.
자유시는 러시아 지명 스보보드니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러시아 혁명세력의 '붉은군대' 적군(赤軍)은 반혁명세력인 백군(白軍)이 점령한 알렉세옙스크를 함락해 해방구로 선포하며 도시 이름을 '자유'란 뜻의 스보보드니로 명명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의회는 1920년 들어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하던 한인 무장부대들을 자유시에 집결시켜 조직을 통합할 계획을 세웠다.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고 러시아 적군의 지원을 받겠다는 계산이었다. 한인사회당 위원장인 이동휘는 대한국민의회의 군무총장이었다.
대표적인 독립군은 박일리아가 이끄는 이항(尼港)부대였다. 니콜라옙스크항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사할린의용대로 재편됐다.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오하묵은 자신이 군권을 지닌 한인보병자유대대에 독립군들을 편입시켰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 등은 이동휘의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따르고 있었다.
두 파가 군 지휘권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국제공산주의조직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이르쿠츠크파는 상해파 부대를 무장해제하려 했다. 상해파가 이를 거부하자 이르쿠츠크파가 공격을 감행했다. 가해자 측에서는 희생자가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이라고 주장했으나 만주 항일단체들이 연명한 성토문에는 사망 303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으로 기록돼 있다.
사망자 303명 가운데는 익사자 31명이 포함됐다. 사할린부대는 현재 체스노코프역이 들어선 수라세프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한인보병자유대대의 공격을 받자 도망치던 대원 일부가 1㎞가량 떨어진 제야강을 건너다가 빠른 물살에 휩쓸려 숨지고 말았다. 일설에 따르면 차마 같은 동족이자 동지이자 전우에게 총을 겨눌 수 없어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 대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세력이 크게 위축된 것은 물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둘러싸고 고려공산당 내분이 격화됐다. 코민테른은 이후 소련(러시아) 내에서 한인들의 독자적인 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지휘 체계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소련에서의 자생적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막을 내렸다.
이르쿠츠크파는 군권을 차지하려고 외세의 힘을 빌려 아군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혁명과 내전에 필요할 때는 한인 독립군과 손잡았다가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버리는 볼셰비키 혁명세력의 민낯도 드러났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을 찾아가는 길은 멀었다. 한국과 정기 항공편이 오가는 하바롭스크에서 열차로 14시간 걸리는 곳이다. 공항이 있는 아무르주 주도 블라고베셴스크와는 150㎞ 남짓 떨어져 있어 비행기에 내린 뒤 자동차로 두 시간 넘게 달려야 했다.
블라고베셴스크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스보보드니에 도착해서도 추모비가 세워진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지도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것은 물론 도로 입구에조차 표지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겨울이라 거리에 오가는 사람도 드물어 여러 집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찾아냈다. 비석 앞에는 누가 언제 바쳤는지 모를 꽃다발이 눈에 덮인 채 놓여 있었다.
비석이 세워진 곳은 공동묘지 인근이어서 참변 당시 희생자가 이곳에 많이 묻혔다고 한다. 소벳스키는 카레이스키(소련의 한인을 일컫는 러시아어로 고려인이라는 뜻) 마을이었다가 1937년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돼 러시아인 마을로 바뀌었다.
지난해 6월 9일 홍범도 장군의 손녀 김알라 씨와 오하묵의 외손자 심천소 씨, 올가 뤼센코 아무르주 부지사, 유리 로마노프 스보보드니시장, 스보보드니시 소년군사학교 학생, 마을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한국의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연해주 우수리스크시 고려인노인단의 최마르가리타 씨, 스보보드니시 전임 부시장 나탈리아 등이 비석 설치에 힘을 보탰다고 한다.
실제로 살육전이 벌어진 체스노코프역은 이곳에서 4㎞가량 떨어져 있다. 이 역은 석탄이나 기름 등을 실은 화물열차가 주로 정차하는 곳이다. 육교 너머에 우뚝 솟은 대형 급수탑은 참변 현장의 랜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당시의 참극을 말해주는 표지나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다.
블라고베셴스크는 대한국민의회가 1920년 5월부터 본부를 둔 곳이다. 레닌 거리와 흐멜리츠코보 거리의 교차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100년 전의 거리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정확한 위치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설립 당시 대한국민회의는 의장에 문창범, 부의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을 선출했고 행정부도 조직해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 탁지총장 윤현진, 군무총장 이동휘, 내무총장 안창호, 산업총장 남형우, 참모총장 유동열, 강화대사 김규식을 추대했다.
대한국민의회는 각국 영사관에 망명정부 성립을 통보하는가 하면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그해 중국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가 추진됨에 따라 8월 30일 해산됐다가 임시정부 성격은 버리고 정치·군사조직으로 1920년 2월 재건됐다. 일본군을 피해 블라고베셴스크로 옮긴 뒤에는 적군에 가담했고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 정책에 따라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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