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 한국어 서툴러 나온 실수…문제 잘 마무리되길"
"처음에 훑어볼 때 좀더 시간을 할애했으면 좋았겠다는 후회한 것이 사실"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소설가 한강(48)이 29일 연합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최근 불거진 '채식주의자' 오역 논란에 관해 처음으로 의견을 표명했다.
그는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31)가 '채식주의자'를 영역하는 과정에서 한국어가 서툴러 몇몇 실수를 했지만, 그것이 작품을 전달하는 데 결정적 장애물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 번역자 스스로 오역 실수를 60여 개의 수정 목록으로 정리해 해외 출판사들에 전달한 사실을 전하며 이로써 문제가 잘 마무리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소설은 2016년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 이 상은 비영어권 작품을 대상으로 주는 상으로, 번역의 역할을 크게 인정해 작가와 번역가에게 동시에 상을 준다. 그러나 이후 한국 문학평론가들과 번역 전문가들 사이에서 스미스의 번역에 오류가 많아 원작을 훼손하는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다음은 인터뷰 답변 전문.
-- 데버러 스미스의 '채식주의자' 번역본을 처음 읽었을 때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은 없었는지.
▲ 제가 그 책의 영역본을 받은 시점은 2013년으로, 이듬해 출간될 '소년이 온다'를 한참 쓰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쓰는 일에 온힘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오래 전에 쓴 '채식주의자'의 원문을 옆에 두고 대조해 가며 읽지는 않았어요. 원래 작가는 전문적인 감수자가 아니니까 보통 그런 일을 하지 않지요. 저 역시 대부분의 작가들이 하는 정도의 일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쭉 훑어 읽으며 이의를 제기하고 싶거나 따로 의논하고 싶은 부분들을 표시해 번역자와 상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닐곱 군데가 눈에 띄었고 그것들을 고치는 과정을 공유했던 기억이 납니다. 역자의 한국어가 아직 서툴다는 것을 느꼈지만, 도착어인 영어 표현이 좋아서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번역된 '소년이 온다'의 경우에는 공적인 의미를 함께 지닌 책이고, 한국 사회와 역사의 맥락을 모르면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정서들이 있어서, 이때에는 저도 나름으로 원문과 대조를 하려 애쓰며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번역자와 이메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 줄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한 페이지씩 설명을 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를 들어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3장의 대사가 있는데, 이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죄의식과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지만, 외국인으로서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죽은 아들에게 건네는 방언의 대화체로 이루어진 6장은 사실상 완전한 번역이 불가능했고, 번역의 과정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하는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적으로 주어진 어려움 속에서 번역자가 고심하고 노력한 결과로 영역본이 완성되었습니다. 세번째로 영역된 책인 '흰'의 경우는, 그 사이 역자의 한국어가 무척 좋아졌고 스스로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이 읽혀 반가웠습니다.
지금까지 오역 논란을 지켜보면서, 제가 처음에 '채식주의자'를 훑어볼 때 좀더 시간을 할애하거나, 전공자에게 본격적인 대조를 부탁했으면 좋았겠다는 후회를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시간을 나름 할애했던 '소년이 온다'에도 간혹 실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역자의 첫 번역인 '채식주의자'보다는 적지만), 언제나 새로운 작품을 쓰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작가로서는 예전에 쓴 소설의 번역 작업을 적극적으로 돕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원작의 작가이지 공역자나 감수자는 아니니까요.
-- 오역 문제를 제기한 평론가나 영어학자들의 주장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먼저 이 논란에는 두 개의 다른 논점이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 첫번째는 오역 문제입니다. 그동안 역자는 자신의 실수를 지적하는 많은 메일을 받았고, 실은 저도 그랬습니다. 관심과 우려의 마음으로 원문과 일일이 대조하여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해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작년부터 관련 자료들을 여러 경로로 수집하고, 몇몇 지인들에게도 도움을 받아 최근에 수정 목록을 완성했습니다. 어떤 기사에는 오역이 백여 군데라고 하던데, 어떻게 그 수치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역자가 최종적으로 완성한 목록은 모두 60여 개로, 단어나 구절, 또는 문장들을 꼼꼼히 수정 교체해 A4 용지 한 장 정도의 분량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목록을 영국과 미국의 출판사, 그리고 영역본을 중역한 몇몇 나라의 출판사들에 전달했습니다. 대부분 한국어가 서툴렀던 데서 나온 분명하고 실질적인 실수로, 이 수정 사항들이 모두 반영되면 부정확했던 문맥들이 명료해져 이해가 명확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 전체가 독자에게 문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양상 자체가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목록이 반영된 책들이 인쇄되어 나오려면 여러 달이 소요될 텐데, 이 과정을 통해 오역의 문제가 잘 마무리되기를 작가로서 바라고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영역본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서는, 편집자들이 삭제한 부분들이 각 책에서 작은 표현들을 모두 통틀어 약 한 페이지 가량의 분량으로 존재합니다. 영어권 편집자들은 한국을 포함한 여러 언어권과 달리 작품에서 많은 부분을 서슴없이 덜어내려 하는 문화적 관례가 있습니다. '소년이 온다'의 경우 첫 편집본에서는 에필로그의 절반 정도가 덜어내져서, 제가 장문의 이메일을 편집자와 끈기있게 주고받으며 대부분을 되살려내기도 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한 책의 전권을 통틀어 한 페이지 정도의 편집은 아무것도 아니며 거의 손을 안 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들 합니다만, 원작자로서는 일부 사라진 문장들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작가와 편집자 사이에 시시로 벌어지는 이런 종류의 치열한 협력과 조율과 논쟁의 과정은 영미권에서는 흔한 것이어서('그들은 성경도 편집하려 들 거야!'라는 농담도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성실하고 책임 있게 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지난한 대화의 과정에서 편집자와 우정이 자라나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것이 특별히 외국 작가들에게 '야만적으로' 행해지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국 작가들의 작품을 더 심하게 편집하지요. 그 점에선 그런 문화가 없는 한국에서 태어난 게 행운이라고 느낍니다.
▲ 다음으로 이 논란의 두번째 논점은 한국어 원어본과 영역본이 '완전하게 다른 책'이라는 견해인데요, 명백하게 존재하는 오역들이 이 견해의 근거가 되고 있어서, 그 실수들을 모두 바로잡는 일이 선행되면 이 두번째 논점이 좀더 분명해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역자인 스미스 씨가 최근에 엘에이 리뷰 북스(LA Review Books)에 실은 글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모호함과 반복과 평이한 산문을 선호하는 한국어를, 정확성과 간결성과 서정성을 선호하는 영어로 옮기는 작업'이라는 표현은, 이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한국문학에도 정확성과 간결성과 서정성을 띠는 작품들이 있고, 영문학에도 모호함과 평이한 산문의 성격을 갖는 작품들이 있으니까요. 다만 한국어가 영어에 비해 뉘앙스가 풍부해 모호하고 미묘한 지점들을 더 갖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예민하게 시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채식주의자'라는 구체적인 소설로 돌아가보면, 이 소설의 1장은 간결하고 냉담한 문체로 씌어져 있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 남편이 주인공 영혜를 묘사하는 장으로, 지극히 냉정하고 세속적인 화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영혜의 고통이 역설적으로 강조되어 드러납니다. 이 장에서는 이탤릭체로 씌어진 영혜의 악몽의 독백만이 시에 가까운 형태를 띠며 화자의 목소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다가 2장으로 가면 화자가 바뀌며 문체가 더 풍성하고 화려해지고, 주인공의 혈육인 언니이자 제 2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혜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3장에 이르면 현재형으로 시제가 바뀌며 가장 내밀한 심리묘사가 진행됩니다. 저는 영역본이 이러한 톤의 변화 과정을 잘 포착해 번역해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가장 논란이 된 1장의 경우, 차갑고 냉정하고 세속적인 한국어의 문장들 아래에는 강한 감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감정은 어떤 신랄함일 수도 있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토록 철저하게 사물로서 대한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과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저의 소설에는, 시를 먼저 썼던 경험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문장들에 뉘앙스가 중층적으로 담기는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의 과정에서 잃을 것이 많은 소설들이기도 합니다. 겉보기에 간명해 보이는 문장들도 그 아래 깔려 있는 강한 감정과 충돌하며 낙차가 생기는데, 그것은 실제로 제가 간결한 문장을 쓸 때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한국어는 영어에 비해 컨텍스트가 중요하고 뉘앙스가 풍부한 언어라는 전제를 상정할 때, '채식주의자'의 영역본은 그 뉘앙스를 포착해 나름의 방식으로 옮겨내려고 노력한 번역자의 시도이자 결과물이라고 생각됩니다.(다른 번역자였다면 그 역시 나름의 다른 시도를 하고 그에 따른 의미있는 결과물을 내놓았겠지요.) 안타깝게도 명백한 실수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수들이 이 소설을 전달하는 데에 결정적 장애물이 되거나, 이 책을 근본적으로 다른 별개의 책으로 만들어버렸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이지만 '채식주의자'라는 책의 번역을 향한 관심과 논란 가운데 어떤 부분은 문학보다는 '성공'에 관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원본을 훼손한 번역자를 비판하거나, 반대로 번역을 상찬하며 원작을 절하하는 과정에서, 때로 문학적인 담론의 지점을 넘어 이 책의 '영광'이 과연 누구의 것인가를 질문하며 어느 한쪽을 선택해 공격하거나 배제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실은 모두가 알다시피 문학은 성공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사업이 아니고, 문학 작품은 사업적 결과물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덧없는 것이고, 그 덧없음의 힘으로 진실과 직면하는 것이고, 세계와 싸우며 동시에 말을 거는 것입니다. 영광과 성공의 비본질적인 프레임을 거두고 문학 자체-말을 거는 행위의 방식-에 논의를 집중한다면 좀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생산적으로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은 독일어 번역자 이기향, 스페인어 번역자 윤선미, 터키어 번역자 괵셀 튀르케주 등에 의해 번역되어서 현지에서 각기 의미있는 좋은 반응을 얻으며 독자들을 만났는데, 비록 제가 그 언어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읽지 못했고 앞으로도 읽지 못하겠지만, 그분들 역시 작품의 의미와 감정, 예민한 톤과 뉘앙스의 미묘한 변화들까지 전달하기 위해 매 문장마다 고심하고 분투하셨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작은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의 2장의 화자가 사회참여적인 작품들을 만들던 젊은 시절의 별명이 '오월의 신부'인데, 이 중의적인, 동음이의어의 말놀이이며 극도로 한국적인 맥락을 가진 표현을 각 언어의 번역자가 어떻게 각주 없이 번역해냈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이처럼 번역은 한 세계와 다른 세계를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연결해내는 고도로 정밀하고 섬세하며 미묘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업 과정에 대한 논의가 더 생산적이고 풍요로운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②편- 한강 "문화계 블랙리스트, 결코 반복돼서는 안 돼"에 계속)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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