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성세대가 부정에 입 다물어 고교생이 겁도 없이 나섰다"

입력 2018-01-30 10:58   수정 2018-01-30 13:32

[인터뷰] "기성세대가 부정에 입 다물어 고교생이 겁도 없이 나섰다"
국가기념일 지정 '대구 2·28 민주운동' 주역 최용호 경북대 명예교수
시위 전날 경북고 등 대구 8개 고교 학생들 모여 독재 항거시위 결의

(대구=연합뉴스) 한무선 기자 = 2·28 민주운동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최용호(75) 경북대 명예교수는 30일 "2·28 민주운동은 해방 이후 첫 자발적 민주화운동이었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2·28 민주운동 국가기념일 지정과 관련해서 한 인터뷰에서 "민주화운동은 대개 대학생이 중심이 됐는데 고등학교 1, 2학년 어린 학생이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다르다"며 "기성세대가 부정에 입을 다물고 있던 무렵 고등학생이 겁도 모르고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큰 운동은 주로 서울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퍼지는데 2·28 민주운동은 대구에서 출발해 대전, 청주, 부산, 마산, 서울로 확산한 점도 특징이다"고 짚기도 했다.
또 "진작에 국가기념일이 돼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희생자는 없었으나 아무도 가지 않던 벼랑길을 처음 걷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선례가 없던 일이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경북대 사대부속고등학교 10회 졸업생으로 1960년 고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2월 28일을 맞았다.
그는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2009년 은퇴했고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 산학연구원 명예이사장,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고문을 맡고 있다.
다음은 최 교수와 문답.
-- 2·28 민주운동이 일어나기 전 사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 1945년 간선으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연임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직선으로 헌법을 바꾸고 개헌 파동 등을 겪으며 민심이 여당인 자유당을 떠나 있었다. 1960년 선거를 앞두고 정상적으로는 여당 대통령과 부통령이 이길 수 없는 분위기였다. 2월 민주당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급작스럽게 서거하자 자유당은 선거를 통상적인 5월에서 3월로 앞당기고 야당 후보들이 선거 유세를 못 하게끔 했다. 당시 세간에 '유정천리'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사대부고 학생들이 조병옥 박사를 흠모하는 내용으로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는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사건이 터져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 2·28 민주운동은 어떻게 촉발했나.
▲ 대구 수성천변에서 2월 27일에는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 후보 강연회가, 이튿날인 28일에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 유세가 예정돼 있었다. 27일은 토요일이었는데 자유당 쪽에서 어떻게든 청중을 많이 동원하려고 동별로 인원을 배정해서 나와라, 직장별로도 참가하라고 요구했다. 반면에 28일 일요일에는 동에서도 참여 못 하게 하고 직장으로 다 출근하게 했다. 대구 시내 8개 국공립 고등학교는 일요일에도 학생들을 학교로 나오게 했다. 27일 하교 후 경북고 2학년 학생회 이대우 부회장 집에서 경북고, 대구고, 사대부고 학생이 일부 모여 집단 시위를 하며 항의 표시를 하자고 결의했다. 선언문을 만들고 다른 학생 집을 일일이 찾아가 연락했다.
-- 학교나 경찰 제지에 어떻게 맞섰나.
▲ 당일 경북고와 대구고는 낮에 지금 경상감영공원 자리인 도청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하다가 학생들이 경찰에 붙잡혀가기도 했다. 제가 다닌 사대부고는 학교에서 문을 잠그고 학생들이 나가는 것을 막았기에 안에서 점심을 거르는 단식 농성을 하다가 어두워져서야 담을 넘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 시청 자리에 있던 경북도지사 관사와 중앙로 매일신문사 쪽으로 나뉘어 행진해 결의문을 낭독하다가 일부가 잡혀가고 그랬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쏟아져나오니 뭘 하려는 건지 경찰이 알지 못했다. 자발적인 시위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대구상고, 경북여고 등에서도 합세해 학생 시위를 주도했고 시민들도 함께해줬다.
-- 2·28 민주운동이 갖는 의미는.
▲ 지금도 4·19혁명 도화선이라고 하는데 4·19혁명 출발점으로 의미가 있다. 대개 대학생이 중심이 돼 시위하는데 고 1, 2 어린 학생이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기성세대가 입을 다물고 있던 무렵 고등학생들이 겁도 모르고 용기를 냈다. 큰 시위는 주로 서울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퍼지는데 2·28 민주운동은 대구에서 출발해 대전, 청주, 부산, 마산, 서울로 확산한 점도 특징적이다. 해방 이후 첫 자발적 민주화운동이었다.
-- 민주화운동으로 조명받기까지도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 첫 기념일인 1961년에 당시 정신을 기리자며 기념식을 열고 명덕로터리에 기념탑을 건립하자고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곧바로 군사 쿠데타로 군부가 정권을 잡아 기념사업 등이 유야무야됐다. 1970년대 들어서는 10월 유신으로 옥외 집회가 금지되고 해서 4·19 세력이 1980년대 중반까지 움직임이 없었다. 한 10여년간은 기념식도 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나중에 명덕로터리에 있던 기념탑이 교통문제를 야기하자 1989년 그걸 이전하자는 얘기가 나오며 2·28 민주운동 관계자가 참여하게 되고 그걸 계기로 모여 2·28 민주운동을 자연스럽게 공론화했다.
-- 2000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화운동 효시임을 천명했다.
▲ 2·28 민주운동 40주년을 앞두고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인식이 있었다. 국가원수가 2·28 민주운동을 확실히 천명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2000년 40주년 기념식에 김 전 대통령 내외가 참석했고 김 전 대통령이 2·28 민주운동이 한국 민주화운동 요람이자 출발이라고 선언했다. 40주년을 맞아 특별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기념사업회만으로는 힘이 약하니 대구시장과 같이 손잡고 같이하자 해서 시장도 의장으로 참여하는 공동의장제를 도입했다. 문희갑 전 대구시장이 첫 공동의장이었다.


-- 국가기념일 지정 소회는. 그동안 해온 사업은 무엇이며 앞으로 과제는.
▲ 진작에 국가기념일이 돼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희생자가 없으니 큰 비중이 없는 역사라는 인식도 주변에 있었다. 아무도 가지 않던 벼랑길을 처음 걷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40주년 이후로 2·28기념중앙공원, 기념회관을 만들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제정으로 민주화운동으로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국가기념일로도 지정받았으니 앞으로 질적 심화가 필요하다.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양대 지주가 돼 대구 시민 정신으로 승화하길 바란다. 국가기념일이 된 만큼 전 국민이 이 역사를 알도록 교육과 홍보를 더욱 강화해나가야겠다. 아카이브 구축사업도 차질 없이 하길 바란다.
msh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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