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임진왜란 때 조선군에 항복해 포로가 된 항왜(降倭) 가운데 사야가(沙也加)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조선군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 제2진의 선봉을 맡아 1592년 4월 15일 부산포에 상륙했다가 부하들과 함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을 찾아 귀순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총과 화포를 다루고 화약을 만드는 법을 조선군에게 가르쳐주는가 하면 순찰사 김수 등을 따라 참전해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 숱한 전공을 세웠다.
조선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자헌대부(정2품)를 제수하고 '김해김씨'(金海 金氏)란 성씨와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김충선의 본관은 다른 김해김씨와 구분해 왕이 하사했다는 의미로 '사성(賜姓)김해김씨'라고 부르며,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우록(友鹿)김씨'라고도 한다. 김충선은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은 물론 병자호란 때도 66세의 나이로 무공을 떨쳤다. 1642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가 살던 우록리에 녹동서원을 짓고 그의 위패를 모신 녹동사를 세웠다.
그가 지은 가사 '모하당술회가'(慕夏堂述懷歌)를 보면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해 오랑캐의 문화를 지닌 일본에서 태어났는가"라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앞선 문물을 보기를 원하던 중 가토 기요마사로부터 선봉장으로 임명되자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하다는 걸 알지만 동방예의지국 조선에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털어놓고 있다. 그는 조선에 귀화하고자 결심한 이유로 요순삼대(堯舜三代)의 유풍을 사모해 동방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겠다는 것과 자손을 예의의 나라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 두 가지를 들었다.
일본에서는 김충선의 귀화를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조선의 자작극이라고 의심해왔다. 1970년대 들어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우록리를 방문한 뒤 책을 펴내 분위기가 바뀌더니 임진왜란 발발 400주년인 1992년에는 일본 공영방송 NHK가 '출병에 대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아사히신문은 '양식 있는 무사의 의로운 결단'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다른 일본 언론들도 '일본의 양심'이나 '인류애의 수호자' 등의 제목으로 그를 소개했다. 2010년에는 일본 와카야마현 기슈도쇼구(紀州東照宮)에 김충선 장군 기념비가 제막됐고, 지난해 9월에는 오노 마사야키 이사장 등 일한문화교류기금 대표단 일행이 우록김씨 종친회 초청으로 녹동서원과 김충선 묘소를 답사하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중국 명나라는 조선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4차에 걸쳐 3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파병했다. 진린(陳璘)은 수군 5천 명을 이끌고 정유재란에 참전해 고금도 등지에서 이순신과 함께 왜군을 무찔렀다. 처음에는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불화를 빚다가 나중에는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에 감화돼 그의 전공을 명나라 조정에 알리는가 하면 그의 전사를 안타까워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전란이 끝난 뒤 귀향해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다. 그의 손자 진조(陳詔)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1644년 조선으로 망명했다. 할아버지의 자취가 서린 고금도에서 경주 이씨와 결혼해 살다가 해남으로 이사했다.
한국에 사는 진조의 후손들은 진린을 시조로 모시고 그의 고향을 따서 '광동진씨'라고 부른다.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이 최대 집성촌으로 전국의 씨족 2천300여 명 가운데 60여 명이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은 '명나라 황제의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한 충신의 후예가 산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진린의 초상을 모신 사당 황조별묘(皇朝別廟)가 세워져 있다. 광동진씨 종친회는 1994년 진린의 고향 광동성을 방문해 중국의 진린 장군 후손들과 만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양국을 교환 방문해 우의를 다지고 있다..
진린은 조·명 연합군 수군 본대가 주둔한 전남 완도군 고금면 묘당도에 삼국시대 촉한의 영웅 관우를 모시는 사당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다. 명나라 군대는 전국 각지에 관왕묘를 건립됐으며 이 가운데 서울의 동관왕묘(동묘)가 가장 유명하다. 진린은 고금도를 떠나며 남은 재물을 섬 주민들에게 주며 관왕묘를 잘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주민들은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으나 일제가 파괴해 옥천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됐다가 해방 후 이순신을 모시는 충무사로 바뀌었다. 전남 완도군은 2020년까지 85억 원을 들여 관왕묘를 복원하고 이순신과 진린 유적을 새로 단장해 한중 우호의 상징물로 삼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독도와 위안부 문제 등으로 냉랭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위안부 문제 합의를 시도했다가 오히려 이것이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된 형국이다. 중국과도 사드 배치와 그에 따른 보복 조치의 여파로 여전히 불편한 사이다. 올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포함한 한국과 일본의 7년전쟁이 끝난 지 420년, 육십 간지로 따지면 7주갑(周甲)이 되는 해다. 두 차례의 왜란으로 조선은 강토가 유린당하고 백성이 살육되는 수난을 당했고, 명나라도 원군 파병으로 국력을 소진해 청나라로 왕조가 교체되는 비운을 겪었다. 우리는 420년 전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면서도 의인 김충선의 선택을 재평가하고 진린과 이순신의 우의를 기리며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한중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며칠 후면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막한다. 이 자리는 남북 화해를 다짐하는 자리이자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무대이다. 한중관계와 한일관계의 발전 없이는 남북 화해도 쉽지 않고 세계 평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2년 뒤에는 도쿄 하계올림픽이 열리고 4년 뒤에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한중일 3국에서 2년마다 연속으로 세계적인 빅 이벤트가 펼쳐지는 것이다. 세 나라 국민이 김충선과 진린을 떠올리며 평창, 도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힘을 모으기를 제안한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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