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고구려비

입력 2018-03-13 08:01  

[연합이매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고구려비
삼국시대 '각축의 역사' 보여주는 중원의 랜드마크

(충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충주 지역은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지정학적 특성과 풍부한 철 산지라는 점 때문에 고대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 고구려, 신라 등 고대 삼국은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계립현과 죽령 서쪽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듯이 이 지역은 삼국의 남진과 북진의 주된 통로로 활용됐다.



마한의 근거지였던 충주 지역은 백제 시대에 낭자곡성(娘子谷城)·낭자성(娘子城)·미을성(未乙省), 고구려 때에는 국원성(國原城)으로 불렸다. 신라 진흥왕 때 국원소경(國原小京)이 설치됐고, 통일신라 시대에 와서 5소경(五小京)의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으로 다시 바뀌었다. 중원경은 경주에 이은 사실상의 제2수도였고, 통일신라는 이곳에 경주의 귀족과 부호의 자제, 가야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했다.
치열한 전투 속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 순으로 주인이 바뀐 이 지역은 고려 태조 23년(940) 때 고을의 중심이란 뜻의 '충주'(忠州)로 개칭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 탓에 삼국시대의 문화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신라 석탑 중 유일하게 7층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과 한반도 내 유일한 고구려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중원문화의 대표적 유산이다.



◇ 높직한 토단 위에 세운 탑평리 칠층석탑

남한강은 계명산(鷄鳴山)과 충주 시가지를 품은 뒤에 'S’ 자로 굽이치며 중앙탑면 탑평리(塔坪里)를 지난다. 탑평리는 남한강을 끼고 서쪽에 발달한 충적 분지로, 마을 이름은 석탑과 관련이 있다. 마을의 옛 이름은 '탑들'로 '탑이 있는 땅'이다.
서기 8세기 후반∼9세기 초에 세워진 탑평리 칠층석탑은 현존하는 통일신라 시대 탑 중 가장 높고 크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3층 양식이 아닌 2중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렸고 그 위에 상륜부를 구성했다. 상하기단에는 기둥과 받침을 의미하는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어 있고, 탑신부의 하층은 여러 매의 돌로 짜여 있지만, 위층으로 가면서 석재의 수가 적어지면서 맨 윗부분인 6∼7층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얇은 듯 평평하며 네 귀퉁이의 곡선 표현도 매끄러워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고, 옥개받침은 층마다 5단이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覆鉢), 앙화(仰花)가 남아 있는데 노반석을 2개로 겹쳐 올린 것은 보기 드문 유적이다. 탑 전체의 높이는 12.86m이지만 높직한 토단(土壇) 위에 우뚝 서 있어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아 보인다.
홍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 쌓은 토단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석탑 바로 앞에 석등의 받침돌로 보이는 팔각 연화대석이 남아 있고, 높이에 비해 너비가 좁은 칠층석탑은 마치 하늘로 치솟은 첨탑처럼 다가온다. 여러 개의 큰 돌로 짜여 있는 기단부와 탑신부, 풍경을 단 자리인 전각부의 작은 구멍은 건립 당시 웅장한 모양에 미적 감각을 곁들인 석탑으로 유추된다.
화강암 재질의 석탑 주변을 돌며 기단의 갑석(기단석 중 하늘로 향한 면)을 살펴보면 재질이 다른 돌로 돼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균열이 간 탑신부의 부분을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도 눈에 띈다.
이정자 문화관광해설사는 "일제 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이뤄진 해체·복원 작업 때 고서류와 구리거울, 목제칠합, 은제사리함, 청동합 등이 나왔다"며 "신라와 고려 시대의 유물이 함께 나온 것으로 보아 여러 번 탑이 중수, 복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방이 탁 트인 토단 위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칠층석탑은 조성 시기와 배경 등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석탑은 절의 법당 앞에 세워지는 것인데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2008년부터 3차에 걸쳐 칠층석탑 주변을 발굴 조사했지만, 사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칠층석탑의 건립 배경을 두고 여러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이 국토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보폭이 같고 걸음을 잘 걷는 장정 두 사람을 한날한시에 영토 남북 끝 지점에서 출발시켰더니 칠층석탑이 있는 자리에서 만났고, 이에 두 사람이 만난 지점에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뒤 부처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포용하고 안정을 꾀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거나 충주 지역에 왕기(王氣)가 발흥하고 있어 탑을 세워 누르고자 했다는 설도 전해 내려온다. 원성왕 설화로 인해 정식명칭보다는 '중앙탑'(中央塔)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천 년 넘게 남한강 곁을 지켜온 중앙탑은 여주 신륵사 강변 절벽에 세운 다층전탑과 마찬가지로 남한강 뱃길의 이정표 역할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앙탑 일대에는 1992년 사적공원이 조성됐고, 석탑 바로 옆에 충주박물관과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이 들어서 있다.



◇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 입증하는 고구려비

중앙탑에서 3㎞ 떨어진 입석마을의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서는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인 '충주 고구려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의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황해남도의 안악 3호분과 개마무사 관련 자료를 통해 고구려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홍문희 문화관광해설사는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듯이 문자왕도 할아버지인 장수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공을 기리기 위해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며 "고구려비는 당시 삼국의 관계와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말한다.
제1전시관은 충주와 입석마을의 역사와 지정학적 중요성, 고구려비 발견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입석마을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선돌 하나가 서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돌을 대장간 집 기둥으로 쓰기도 하고 백설기를 바치며 아들 낳기를 빌기도 하는 등 마을 수호석이라 여겼다.
선돌은 1972년 대홍수에 쓰러지기도 하면서 기나긴 세월 동안 고구려 역사를 간직한 채 서 있었다. 충주 지역 향토사 연구단체인 예성문화연구회가 1979년 우연히 발견해 학계에 제보했고, 학술조사단이 이름 없이 서 있던 비석의 글씨를 판독하면서 고구려의 비석임이 알려지게 됐다.



◇ 서양보다 천 년 앞선 고구려 개마무사

고구려 연표를 통해 고구려의 태동과 성립을 이해할 수 있는 복도를 지나면 제2전시관이다. 이곳에는 높이가 6m를 넘는 돌에 1천775자가 새겨져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이 전시돼 있는데 전시 공간이 비좁아 일부분만 펼쳐져 있고 대부분 말려 있다.
반면 안악 3호분(북한 국보 제28호) 코너는 비록 무덤 벽화모사도지만 흥미를 더한다. 안악 3호분 벽화는 250여 명으로 구성된 대행렬도, 묘주 부인의 초상, 마구간, 우물, 부엌 등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안악 3호분의 주인은 누구일까?'라는 패널 내용을 읽으면서 남북 간 왕래가 활성화되어 안악 3호분 벽화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했다.
이어지는 고구려의 정예병과 개마무사 코너에는 갑옷 입힌 말을 탄 개마무사의 조형물이 전시돼 있다. 개마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한다. 개마에 탄 기병을 개마무사라 불렀다. 서양보다 천 년이나 앞선 고구려 개마무사는 화살과 창에도 끄떡없는 승전의 수호신이었고, 광개토대왕 당시 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제2전시관에서 복도를 지나면 전시관 끝자락인 제3전시관이다. 넓은 공간 둘레에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를 지키는 네 마리의 상징적인 동물인 청룡·백호·주작·현무가 그려져 있고, 전시관 한가운데 충주 고구려비가 서 있다.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릉비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으나 크기는 훨씬 작다. 고구려비는 총 높이 203㎝, 비면 높이 144㎝, 너비 55㎝다.
자연석을 이용해 비면을 갈고 4면 모두에 글자를 새겼는데 앞면과 좌측면에서만 글자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방치한 탓에 판독이 완전치 못하지만 당대의 역사를 고증하는 아주 귀중한 글자들이 많이 나왔다.
앞면 서두에는 '고려(고구려) 대왕(高麗大王)이 신라왕과 대대로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하고 이에 신라왕이 공손히 응했다'고 기록돼 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과 함께 신라왕을 매금(寐錦)으로 불렀던 것에서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내당주(內幢主),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같은 말은 당시 고구려의 관등조직이나 인명 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는 중국 지방정권"이라고 역사를 왜곡하는 지금,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고구려비 전시관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답사지'라 할 만하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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