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최영미 시인이 시 '괴물'에 'En'이라는 지칭으로 한 원로 시인의 성추행 행적을 폭로해 파문이 인 가운데 그의 과거 작품을 비롯해 문단 권력을 풍자하거나 비판한 작품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최 시인이 2005년 펴낸 세 번째 시집 '돼지들에게'는 한국 사회 지식인, 강자들의 위선과 탐욕을 꼬집어 출간 당시에도 화제를 모았다.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그는 여우가 되었다//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중략)//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오래된 역설이…… 나는 슬프다." ('돼지의 변신' 중)
특히 시 속의 '돼지'와 '여우'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진주'는 무엇을 말하는지를 놓고 문단에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시인은 2014년 개정판을 내면서 '시인의 말'에 "시 속에 등장하는 돼지와 여우는 우리 사회를 주무르는 위선적 지식인의 보편적인 모델이다. '돼지의 변신'을 쓰기 전에 머릿속에 생각해둔 '아무개'가 있었으나, 시를 전개하며 나도 모르게 '그'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소설가 이문열은 1994년 발표한 단편소설 '사로잡힌 악령'에서 한 승려 출신 시인이 환속 후 시인으로 등단해 민족시인으로 추앙받으며 여성들을 농락하는 이야기를 그려 특정 인물을 연상시킨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이 특정인에 관해 쓴 것이 아니라며 작품 목록에서 삭제해 논란을 잠재웠다.
최 시인은 7일 SBS 뉴스에 나와 특정 인물이나 사건 자체보다는 문단의 권력 구조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다 연 게 아니다. '엔(En) 선생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었다"며 시인ㆍ평론가이자 주요 문예지 편집을 좌지우지한 한 남성 문인의 성희롱 사례를 들었다. 이어 "중요한 건 권력 문제다. 문단의 파워하우스(유력집단)가 거의 마피아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문단 내 성폭력 문제는 최근 세계적인 '미투' 운동과 최 시인의 폭로로 큰 이슈로 떠올랐지만, 과거에도 문단의 주류 남성 문인들의 폭력적인 행태에 맞선 고발과 저항이 있었다.
2016년 하반기 이름있는 남성 문인들의 성범죄가 수면 위로 떠올라 형사 처벌을 받는 등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그동안 참아온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여성 문인들이 힘을 모아 문단 내 성폭력에 맞선 저항의 기록을 담은 문집 '참고문헌없음'을 지난해 출간하기도 했다.
또 김현 시인은 '21세기 문학' 2016년 가을호에 기고한 '질문 있습니다'란 글에서 남성 시인들이 여성 시인들을 옆에 앉히고 술을 따라보라고 명령하거나 술이 잔에 꽉 차지 않았다며 술잔을 자신의 바지 앞섶에 가져가 희롱한 사례 등 추태를 열거하며 문단에 만연한 성폭력과 여성혐오 문제를 공론화했다.
과거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1년 노혜경 시인 등이 주축이 돼 개마고원에서 펴낸 '페니스 파시즘'이란 책이 있다. 노 시인은 이 책에 게재한 '문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성폭력' 등의 글에서 당시 여성들을 분노케 한 문단의 성폭력ㆍ여성혐오 사건과 그 배경이 된 파시즘적 성격의 문단 권력을 비판했다.
당시 문단에서는 고(故) 박남철 시인이 한 여성 문인을 연상시키는 호칭을 넣어 성적 비하 표현과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쓴 시 '오늘 외출했다가'를 창작과비평사(창비)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버젓이 게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글은 며칠간이나 올라와 있었고, 창비는 결국 해당 게시판을 폐쇄했다. 남성 문인들 중 이를 공개적으로 나서서 제지한 이는 없었다.
노 시인은 이를 비판하는 글에서 "그 성폭력이 저질러지고 있던 동안이나 그 뒤에도 문단권력자들이 거의 죽음 같은 침묵에 빠져 있다"고 질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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