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번째 시집 '그 길에 네가 먼저 있었다'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는 건 '너'를 남겨둔 부분 때문일 거예요. 거기에 사람들이 들어와 앉는 거죠. '네가 먼저 있었고 나는 잠시 있다 가고 싶다, 같이 가도 되겠니?' 그런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요즘의 '미투'도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새 시집 '그 길에 네가 먼저 있었다'(밥북)를 낸 나태주(73) 시인은 이 시집을 소개하며 최근 뜨거운 '미투(me too)' 운동을 언급했다.
"내가 극대화되고 너(상대방)가 극소화됐을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여자와 남자가 손을 잡는 게 나쁜가요? 동의를 하고 승낙이 있어야 하고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게 아니어서 나쁜 거죠. 저쪽이 아닌데, 이쪽에서 100%라고 마음대로 하면 그게 갑질이죠."
그러면서 그는 이를 다시 시인과 자연의 관계로 가져와 "시인도 자연에게 갑질하면 안 된다. 겸손하게 '나는 조금만 가질테니 나머지를 가지세요, 할 말 있으면 해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새가 왜 말을 안 해주겠나"라고 했다.
이번 시집은 그의 서른아홉 번째 시집이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47년 가까이 써오긴 했지만, 같은 기간이라도 이렇게 많이 쓴 시인은 흔치 않다.
"내가 쓰는 게 아니고 주변의 사람과 사물, 자연이 시를 쓰게 합니다. 이것들이 나에게 자극을 주면 내가 그 자극에 반응해 시를 쓰는 거죠. 전혀 모르는 아이가 앞에 있어서 내가 '예쁘다' 생각하면 아이가 씨익 웃어요, 그리고 내게 꾸벅 인사를 합니다. 그 장면이 한 편의 시가 되는 거죠. 내가 진짜 쓰고 싶은 시는 폭풍에 몸을 흔드는 숲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하늘과 구름의 마음을 읽어내고 싶은 거예요."
이번 시집에서도 그렇게 '너'와 내가 아닌 존재들을 먼저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문을 열자 거기에/네가 있었다//꽃을 들고 있지는 않았지만/네가 꽃이었고/바람이 불지 않았지만/네가 바람이었다//출렁! 나는 그만/호수가 되고 말았다." ('호수ㆍ1' 전문)
세상의 존재들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이런 시들은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아왔다. 그의 시 '풀꽃'("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은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에 오른 글귀 가운데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뽑히기도 했다.
"지금은 거대담론이 아니라 생활담론, 개인담론이 중요해진 시대예요. 내가 지난 5∼6년 동안에 1년에 100번 내지 200번 가까이 학교와 지자체, 도서관 등으로 문학 강연을 다녀보니 사람들이 나 자신을 찾고 싶어 하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싶어 하더군요. 그런데 의외로 요즘 사람들이 자존심은 높은데 자존감이 형편없이 떨어져 있어요. 밖에서 으스대고 자랑하고 그런 것은 자존심인데, 집에 돌아와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는 건 자존감이 떨어졌기 때문이죠. 밖에선 다 의젓하고, 돌아와서는 다 찌그러져 있고. 그 사이 공간에 불행감이 들어가는 거죠. 이 벌어진 것을 채워야 합니다. '너는 귀하다, 너는 사랑받을 만하고 훌륭하다, 잘 될 것이다' 이렇게 해줘야 하는데, 아무도 해주지 않아요. 내 시가 사랑받는 건 그런 점 때문이겠죠."
그러면서 그는 "예전에는 김소월의 시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급해져서 그렇다. 저녁에 피곤한데, 책을 보면 더 피곤해지지 않겠나. 더 피곤하게 하면 안 읽힌다. 마음으로 위로받으면 자신한테 플러스니까 읽는 것"이라며 요즘 나오는 시들의 난해함을 지적했다.
그는 원로 시인이지만, 그의 시는 젊은층에서도 사랑받는다.
배우 이종석은 나태주 시인의 시로 큰 위로를 받았다며 지난해 말 시인과 함께 시집 '모두가 네 탓'을 냈다. 아이돌 그룹 멤버이자 배우로도 활동 중인 육성재는 최근 TV 예능 '집사부일체'에서 나 시인의 시 '사는 법'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번 시집에서도 젊은 세대가 SNS에 올리며 쉽게 공감할 만한 시들이 많이 눈에 띈다.
"너/나 보고 싶지 않았니?//이것은 내가 너를/보고 싶었단 말이고//너/그동안 아프지 않았니?//이것은 내가 조금/아프기도 했다는 말이다." ('변명ㆍ2' 전문)
"너는 내 앞에 있을 때가/제일로 예쁘다//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너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내 앞에서는 별이 되고/꽃이 되고 새가 되기도 하는 너//나도 네 앞에서는/길고 긴 강물이 되기도 한다." ('네 앞에서' 전문)
시인은 "나는 겉으론 70세 넘은 노인네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이가 있다. 늙은 시인이 젊은이, 아이들을 보며 건네는 말 속에는 삶의 경험과 지혜도 들어있어서 더 좋아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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