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유엔의 꿈"…장 지글러가 들추는 유엔의 속살

입력 2018-02-23 09:45  

"부서진 유엔의 꿈"…장 지글러가 들추는 유엔의 속살
신간 '유엔을 말하다' 출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시절인 2015년 9월 유엔은 국제사회가 달성해야 할 목표를 담은 '2030 의제'를 발표했다. 이를 전 세계에 공표하는 역할을 맡은 이는 카타르 왕의 어머니인 셰이카 모자 빈트 나세르 알 미스네드였다.
군주국인 카타르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방글라데시, 인도, 네팔 등지에서 온 180만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다. 이주민은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2022년 월드컵을 유치한 카타르에서 2010~2016년 고속도로, 스타디움, 호텔 등을 짓다 죽어간 외국인 노동자 수만 1천400명을 웃돌지만, 왕가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카타르 왕족이 강제 노동 종식 등 인류의 거룩한 목표를 발표하는 임무를 맡은 까닭은 무엇일까. 반 총장의 선택에 의아해하는 스위스 사회학자 장 지글러에게 '2030 의제' 관계자는 한 마디로 답한다. "카타르인들이 돈을 내거든."
지글러 신간 '유엔을 말하다'(갈라파고스 펴냄)는 투기자본의 약탈과 열강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무기력해진 유엔의 진짜 얼굴을 들추는 책이다. 그는 2000~2008년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고 2008년부터 지금까지는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유엔을 한가운데서 지켜봐 왔다. 그는 생사를 넘나들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의 뿌리와 창설 과정, 운영 방식 등을 이야기하며 유엔의 명암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저자는 질병, 영양실조, 기아,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 등으로 주로 남반구 주민이 희생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제3차 세계대전은 오래전에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는 '벌처펀드'로 불리는 극소수 투기적인 자본 집단을 원흉으로 지목한다. 이들은 위기에 처한 기업이나 국가의 채권을 사들인 뒤 되파는 것으로 이익을 챙긴다. 2015년에만 해도 26개 '벌처펀드'가 32개의 채무국을 상대로 200건이 넘는 소송을 제기했다. 말라위, 잠비아, 콩고민주공화국 등 이들에게 무자비하게 물어뜯긴 국가들은 기아나 질병으로 죽어가는 국민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도 이들 앞에서 사실상 꼬리를 내렸다.
힘의 논리도 평화와 정의 수호를 위해 탄생한 유엔을 좀먹는다. "한 명을 죽여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감옥에 갑니다. 열 명을 죽이면 정신 병동에 갇힐 겁니다. 1만 명을 학살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평화회담에 초청받을 겁니다." 저자는 1997년부터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난의 말을 빌려 집단살해를 제대로 단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정의의 보루처럼 여겨지는 국제형사재판소(ICC)가 공식적으로 문을 연 지 16년이 지났지만, ICC의 권능은 그렇게 단단하지 않다. 미국부터가 ICC 설립근거가 되는 로마규정을 배척하면서 ICC와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저자는 미국 정부가 세계 곳곳에서 법적인 판결을 거치지 않고 자의적인 처형을 시행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살인자의 일방적인 정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유엔 곳곳에 침투한 미국의 힘은 우리가 짐작했던 것 이상이다.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는 미국 반대에 부딪혀 허울뿐인 부서로 남았다. 미국의 비호를 받은 이스라엘은 고등판무관과 특별조사관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반기문 전 총장의 선출 과정도 유엔 내부의 정치 논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유엔은 힘을 잃어 창백해졌다. 유엔을 지탱했던 꿈, 세계적인 차원에서 공공질서를 회복한다는 꿈은 부서졌다."
하지만 꺼져가는 잉걸불 속에서도 작은 불씨는 계속 타오르는 법이고, 살인적인 세계 질서를 다시 일으켜 세울 힘이 시민 하나하나에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책의 궁극적인 메시지다.
감시와 공작, 협박, 테러에 굴복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한 채 인류를 위해 함께 싸워온 수많은 이들이 이를 증명한다.
전작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불평등을 야기하는 구조의 악순환을 통렬하게 고발했던 저자의 필력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현웅 옮김. 372쪽. 1만6천800원.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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