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문은 활짝, 비상구는 막히고…스프링클러 설치엔 "비용이 얼만데"
(밀양=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아무리 대형 화재 참사가 나더라도 그때뿐입니다."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 한 달째인 26일 김해 시내 한 요양병원이 들어선 건물 1층.
식당과 편의점 등이 들어선 이 건물 1층 복도를 따라 중앙 비상계단 쪽으로 향하자 방화문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
이 방화문은 평소에도 항상 열어 놓는 듯 아예 열린 채 고정돼 있었고 문 아래에는 술과 음료수 상자가 쌓여있었다.
또다른 병원이 입주한 한 상가건물 방화문에는 아예 문을 여닫지 못하도록 바닥에는 고임목을 받쳐놓거나 도어체크 장치를 조작해 문을 아예 열어 놓는 곳도 있었다.
상가 관리인은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 이후 소방시설 단속이 강화돼 방화문 상태를 확인하지만, 식당 등 가게 주인들이 닫아두면 건물이 침침하고 어두워 손님을 받으려고 열어 놓기 일쑤"라고 말했다.
소방시설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방화문은 항상 닫힌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방화문은 원래 문이 항상 자동으로 닫히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일부러 열어 놓거나 심지어 미관상 이 문을 제거하는 곳도 많다.
화재 참사가 난 밀양 세종병원은 2005년 4월 시에 제출한 병원 증축 설계도면 상엔 건물 내 1층 계단 양쪽에 '갑'이라고 표시한 방화문 2개가 있었지만, 정작 화재 때는 방화문이 없었다.
당시 1층 응급실 천장에서 난 불은 이 방화문이 없는 바람에 2층 이상 위로 불길과 연기, 유독가스가 삽시간에 번지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공하성 경일대 소방재학과 교수는 "1층 출입문은 미관이나 편의성을 고려해 일반유리문이나 문을 아예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공 교수는 "이번처럼 1층 계단을 통해 유독가스가 급격히 유입되면 다른 층에 모두 방화문이 잘 설치돼 있어도 중요한 대피로인 계단이 유독가스로 가득 차 대피를 어렵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화재 등 정전 시에 대비한 비상발전기 설치도 여전히 허술한 곳이 많은 것으로 소방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현행 의료법 제34조는 비상용 발전기를 자가발전시설로 분류하고 세종병원과 같은 병원급 이상은 의무적으로 비상발전시설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발전 용량이나 규모 등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형식적인 설치에 그치는 곳이 많다.
불이 난 밀양 세종병원에서는 비상발전기가 가동되지 않았고, 발전 용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상당수 중소형 병원이나 시설이 오래된 요양병원에는 초기 화재 진화에 큰 역할을 하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았다.
세종병원에는 스프링클러도 없어 큰 아쉬움을 남겼다.
현재 병원 내 스프링클러 설치는 기존 의료시설 4층 이상 층에 바닥면적 1천㎡ 이상인 경우에만 설치하게 돼 있다.
그러나 세종병원은 5층 건물이지만 바닥면적이 224.69㎡여서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었다.
이처럼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대상에서 제외된 중소형 병원은 수두룩하다.
김해시의 경우 밀양 화재 참사 후 지역 의료복지시설을 점검한 결과, 병원에는 35곳 중 16곳, 요양병원 32곳 중 10곳은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경남도와 밀양시는 병원 화재 참사를 막기 위해 이달 20일 재난안전 정책협의회를 열고 스프링클러 설치를 전체 의료시설로 확대하는 방안을 중앙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소방시설 '셀프점검' 문제가 심각한 것도 세종병원 사례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현재 소방법상 연면적 5천㎡ 이상 건물은 전문업체에 의뢰해 종합정밀점검을 받아야 하지만, 기준 미만 건물은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증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안전 점검을 할 수 있게 돼 있다.
이 때문에 충북 제천 참사 때도 그랬지만 이번 세종병원 경우에도 건물주 가족이나 관계자가 뻔히 보이는 부실 점검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남도소방본부는 최근 병원 화재 사고 이후 도내 주상복합, 근린생활시설 등 피난 방화시설 1천524곳을 점검한 결과, 396건의 위반 사실을 적발했다.
이들 적발된 시설 가운데 중소병원이 많았다.
위반 사항은 화재 때 생명과 직결되는 비상구 폐쇄, 건축물 불법 증·개축 등이 많았다.
모두가 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를 키웠던 것과 동일한 안전 불감증이다.
한 중소병원 관계자는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면 건물 전체를 손봐야 할 만큼 비용 부담이 커 솔직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법적인 규제를 받지 않는 병원이면 생각조차 못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환자와 노인 등 재해 약자들이 있는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대한 소방시스템을 건축 때부터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박재성 교수는 "재해 약자는 정상적인 피난이 어려운 만큼 병원은 이용시설에 대한 제한이 필요하다"며 "거동이 어려운 중증환자 공간을 아예 1층에 배치하는 것도 한 방안"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중소병원의 소방 설비 부담 가중에 대해서는 "외국 사례처럼 보험과 연관 지어 건물 화재위험도를 평가하고 안전성을 따져 보험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choi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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