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남성 중심적·군대식 상명하복 문화 개선 필요"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황재하 최평천 기자 = 교수와 제자, 신부와 신도, 극단대표와 배우, 조직의 간부와 부하 직원….
하루가 멀다고 각계에서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며 터져 나오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사례들은 '권력형 성범죄'라는 말로 포괄된다. 대부분의 가해자는 조직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는 남성이고, 피해자는 열세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다.
윗사람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도 문제를 제기하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두려워 쉬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 삼키며 곪아 들어갔던 수많은 상처가 최근 일거에 터져 나오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권력형 성범죄가 암암리에 횡행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남성 중심 조직문화와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를 지목한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이번 성폭력 폭로 사건의 대부분은 권력형 성범죄"라며 "조직문화 결정권자, 즉 권력 수장을 남성이 독식하는 구조이고, 남성 중심적 문화가 공적·사적 영역에 군림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가해자들은 대부분 기성세대"라며 "가부장제 문화에 찌들어있던 기성세대 남성들이 권력을 이용해 여성들을 수탈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문화에서는 남녀라는 성별 차이 자체가 곧 권력관계로 이어진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남성 중심문화라는 토대 위에 있다면 어느 조직에서든 여성은 남성이라는 '성별 권력'이 가하는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 중심문화 속에서 여성은 차별과 배제 대상이고, 배제하는 기제 중 하나가 성폭력"이라며 "문화예술계 등 개별 집단의 특수성도 있겠지만, 본질은 젠더(성별)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다.
남성 중심적인 조직에서 여성이 승승장구해 권력을 거머쥐려면 남성적 사고방식을 체화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이런 여성을 두고 '명예남성화'했다고 지적하면서 권력형 성범죄를 더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했다.
실제로 검찰 내부에서는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사건을 조사하고자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조사단'이 꾸려진 뒤 단장을 맡은 조희진 서울동부지검장이 과거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을 무마하려 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연희단거리패 김소희 대표는 극단을 이끄는 이윤택 연출이 단원들에게 수시로 안마를 요구하고, 때로는 이런 행위가 유사 성행위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묵인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윤김 교수는 "남성 중심적 조직 안에서 여성이 성공하려면 남성적 문법을 체화할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조직의 수장에 올라선 여성은 가해 남성과 동급으로, 또는 더 심하게 다른 여성을 착취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 뿌리박힌 상명하복식 군대문화도 권력형 성범죄가 활개 칠 수 있었던 토대 중 하나로 꼽힌다. 상사가 지시하면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조직에서 피해자는 감히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 권력구조에 녹아있는 군대 문화가 조직 내 성폭력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한 측면이 있다"며 "과거에는 상당한 정도의 관행적 차별을 용인해줬지만,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나영 교수는 "군사주의 문화가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 사회 전반을 지배해왔다"며 "상명하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조직 안에서 어떻게 약자인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조직 내 권력형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엄벌하는 것에서 그칠 게 아니라 지금의 남성 중심·가부장적 조직문화를 '변혁' 수준으로 바꿔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이나영 교수는 "정치권에서 아무리 법과 제도를 바꾼다고 해도 집행자의 의지가 약하면 이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사회 전반에 걸쳐서 문화적 변혁이 필요하고, 지금 미투 운동은 이같은 변혁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조직 내에서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유리 천장을 부수는 일도 시급한 과제로 꼽혔다. 공기업과 대기업부터 나서 여성임원 할당제를 시행해 조직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여성 숫자를 절대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윤김 교수는 "우리 사회 대부분의 관행은 남성 중심으로 구축돼 있다"며 "지금처럼 유리 천장 구조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황에서는 '남성들의 연대'를 깰 수 없고, 권력형 성범죄도 근절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성들도 스스로 '내가 언제든 권력형 성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각성해야 하며, 여성은 피해를 봤을 때 주저 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개인 차원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개개인의 노력만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조직 차원에서는 내부 성범죄 신고센터를 만들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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