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프랑스 한인명단 확인…나라 잃었어도 국적은 '한국'

입력 2018-02-28 05:00   수정 2018-02-28 09:59

100년 전 프랑스 한인명단 확인…나라 잃었어도 국적은 '한국'

파리7대 이장규씨, 1920년 佛 지방정부 자료서 한인노동자 명단 발굴
1차대전 전사자 시신안치, 묘지조성으로 번 돈 십시일반…임시정부 활동 도와
3·1운동 한해 뒤 쉬프서 1주년 기념식…프랑스에 울려 퍼진 만세삼창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100년 전 일제 치하에서 프랑스로 이주해 1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복구하는 고된 삶을 살던 한인들이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이 전면전을 벌인 전장에서 나온 시신을 묘지에 안치하는 험한 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임시정부의 활동을 돕고 3·1 운동 1주년 기념식까지 열었던 사람들…
이들의 이름과 출생지, '한국인'이라는 국적이 명확히 기재된 거주자 명부가 프랑스 지방정부 소장자료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프랑스 파리 7대학(디드로대학) 한국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인 독립운동사 연구자 이장규 씨는 파리에서 동쪽으로 200㎞ 떨어진 소도시 쉬프(Suippes)에서 100년 전 거주하던 한인들의 명단을 프랑스 지방정부 자료에서 확인했다고 27일(현지시간) 밝혔다.
이씨가 작년 가을부터 쉬프 시를 관할하는 마른(Marne) 도청 자료실을 뒤져 최근 찾아낸 1920년 쉬프시청의 외국인 명부에는 박춘화·박단봉·차병식·배영호·박선우 등 한인 37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프랑스 도착 일자, 프랑스 정부에 체류증을 신청한 날짜, 직업 등 인적사항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제 치하에서 외국의 한국인들이 일본이나 중국 국적자로 활동했던 것과 달리 이 명부에는 한인들의 국적이 한국인(Coreen)이라고 명시된 것이 큰 특징이다.

국제사회에서 당시 한국은 일제의 침략 이후 이미 소멸한 나라였기 때문에 한인 노동자들이 한국 국적으로 프랑스의 체류허가를 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이는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국을 빼앗긴 채 러시아 연해주와 북해,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건너온 한인들은 독일과 프랑스의 1차대전 격전지였던 베르덩(Verdun) 인근의 소도시 쉬프에 정착해 전후 복구사업에 참여했다.
베르덩 전투에서 독일·프랑스 양측은 7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냈고, 승전국 프랑스의 대규모 복구사업에는 한인뿐 아니라 벨기에·스페인·러시아 등 다양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이장규 씨의 현장 조사결과 당시 한인들은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폐허가 된 마른 지방 일대의 철도 복구, 시신과 유골 안치, 묘지 조성사업에 주로 참여했다.
쉬프향토사연구회 장노엘 우댕 회장에 따르면 한인들은 현 쉬프역 인근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이씨는 "지금도 한인들이 살던 집이 몇 채 남아있으며, 현지의 시장이나 향토사 연구자들이 한인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수석연구위원의 논문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 재법한국민회 연구'에 따르면, 쉬프의 한인들은 당시 전쟁 폐허를 복구하는 고된 삶을 살면서도 1919년 11월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라는 한인 단체 결성에 참여했다.
한인 노동자들과 유학생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인사들이 이 단체의 주축이었다.
한인 노동자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활동을 돕는가 하면, 유학생과 지식인 동포들로부터 한국역사와 지리, 국어 등을 배우며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료로 남은 이들의 가장 큰 외부 활동은 1920년 3월 1일 쉬프에 유럽 각지의 한인들을 초대해 3·1 운동 1주년 기념 경축식을 연 것이다.
당시 신문 '신한민보'에 따르면, 경축식에는 한인 노동자 35명과 학생 10여 명, 영국 런던에서 가족을 데리고 온 10여 명, 파리위원부 인사들이 모였다.
행사장의 벽에는 한국과 프랑스의 국기가 걸렸고, 참석자들은 애국가 합창과 '대한독립 만세' 삼창 등을 하며 1년 전 조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3·1 운동의 정신을 기렸다.

이 행사의 비용은 쉬프 거주 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거둬 마련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파리위원부에 6개월간 6천 프랑의 거액을 기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프랑스의 한인 노동자를 50명으로 가정하면 한 명 당 평균 20프랑을 낸 셈인데, 당시 프랑스의 노동자 평균임금을 고려하면 한인들이 한 달 수입의 4분의 1을 파리위원부에 기증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도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논문에서 "이는 당시 국외 어느 지역에 있는 한인들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자금을 냈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한인 노동자들의 프랑스 정착과 생활을 도운 핵심 인물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서기장 황기환이었다.
수원 태생의 그는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1차 대전 발발 후 미군 소위로 참전, 베를린에 주둔할 때의 인연으로 1919년 임정 파리위원부에 합류했다. 황기환은 영국 에든버러에 있던 한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송환될 뻔한 것을 영국 정부를 설득해 프랑스로 일부를 이주시킨 장본인이다.
러시아 연해주를 거쳐 북해 무르만스크의 철도공사에서 일하던 한인들은 1차대전이 끝나자 1919년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에 의해 에든버러로 건너갔고, 영국 정부는 당시 동맹국(영일동맹)인 일본의 요구에 따라 이들을 일본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던 황기환이 이런 소식을 듣고 영국으로 건너간 뒤 영국 정부에 항의, 한인 노동자들의 일부를 프랑스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마른도청 소장자료에서는 당시 쉬프의 한인 가정이 자녀를 출산한 기록도 처음으로 확인됐다.
한인 이도순·백오난 부부가 1921년과 1924년 낳은 '루이'와 '조르제트'라는 이름의 자녀 출생증명서로, 한인 박병서, 박춘화가 동포 자녀의 출생신고 증인을 선 것으로 돼 있다.
한인들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전후 폐허를 복구하는 힘든 삶 속에서도 후손들을 낳아 기르고 가르치던 삶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쉬프에서 1차대전의 폐허를 복구하던 한인들은 1924년 이후 파리 등 대도시로 이주했고, 그 이후의 삶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나 사료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이장규 씨에 따르면 원래 쉬프시청 자료실에는 전후복구에 참여한 한인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관돼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자료실이 불타면서 한인 관련 자료들이 대부분 소실됐다고 한다.
파리 디드로대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강의한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한인 노동자들의 실체가 100년 만에 프랑스 기록으로 확인된 사례로, 프랑스 최초의 한인 이주집단 연구에 있어서 중요 사료"라고 평가했다.
yongl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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