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반체제·극우에 총선 몰표 伊…"새 희망" vs "걱정에 잠 설쳐"

입력 2018-03-06 07:00   수정 2018-03-06 08:01

[르포] 반체제·극우에 총선 몰표 伊…"새 희망" vs "걱정에 잠 설쳐"
세대·계층·지역별로 극명하게 표 갈려…"분열 극복할 수 있을지 우려"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새로운 이탈리아에 대한 희망이 생겼습니다."(20대 로마 거주 바텐더 안드레아)
"한 마디로 '재앙' 입니다. 앞으로가 걱정돼서 어제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요."(70대 밀라노 거주 연금생활자 에르마노)
향후 5년 간 상원과 하원을 책임질 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반체제, 극우 정당을 정치권의 주류로 만들어주는 선택을 한 이탈리아는 새로운 현실에 표정이 엇갈리는 모습이다.

4일 실시된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강경 난민 정책을 공약하고, 유럽연합(EU)에 회의적인 반체제 정당과 극우 정당이 크게 약진했다.
9년 전 좌와 우로 나뉜 기성 정치체제의 부패를 심판하겠다는 구호 아래 탄생한 신생정당 오성운동은 32%를 웃도는 득표율로 단일 정당 가운데 최대 정당으로 발돋움, 이탈리아 정계의 지각 변동을 예고했다.
약 37%의 표를 얻어 최다 득표를 한 우파연합에서는 "난민이 이탈리아를 침범했다"는 과격한 구호와 함께 '이탈리아 우선'을 외친 극우정당 동맹이 당초 예상을 깨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정당 전진이탈리아(FI)에 득표율이 앞서는 이변을 연출했다.
우파연합의 또 다른 구성원인 이탈리아형제들(FDI)도 4%가 넘는 표를 얻어 우파연합의 최다 득표에 기여했다. 이탈리아 국가의 첫 소절에서 당명을 딴 FDI는 동맹처럼 반(反)난민, 반(反)이슬람을 주장하는 국가주의 정당이다.
오성운동, 동맹, FDI 등 극우·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성향의 정당들이 이번 선거에서 얻은 표의 총합은 약 55%에 달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5년 전 총선에서 이들이 얻은 표의 합계가 30%를 약간 웃돌 던 것에 비교하면 득표율이 20%포인트 이상 상승한 것이다.
서방 주요 국가에서 극우·포퓰리즘 진영의 선거 득표율이 절반 50%를 넘은 것은 이탈리아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몇 년 동안 대거 유입돼 사회,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킨 난민에 대한 반감은 강경한 난민 정책을 공약한 극우와 포퓰리즘 세력이 맹위를 떨치는 자양분이 됐다.
이탈리아에는 2013년 이래 현재까지 아프리카·중동발 난민 약 70만 명이 지중해를 건너 쏟아져 들어왔다. 유럽연합(EU) 다른 국가들이 난민 분산 수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탓에, 2016년부터는 그리스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나홀로' 난민 부담을 떠안고 있는 실정이다.

또, 2008년 이래 최악의 경기 침체를 겪으며 실업률과 빈곤율, 빈부 격차가 치솟고 있는 현실에서 대중은 기득권을 심판할 것을 주장하는 극우, 포퓰리즘 세력에 표를 몰아주는 것으로 분노를 분출했다.
아울러 저소득층에 매월 기본소득 730 유로(약 1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오성운동, 현행 최대 43%인 개인 소득세를 15%로 낮추겠다고 천명한 동맹의 포퓰리즘 성격의 공약도 이들의 지지율 상승에 힘을 보탰다는 분석이다.
선거 다음날인 5일 로마의 거리와 상점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표정은 평소보다 한층 밝아 보였다.
카페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25살 청년 안드레아는 자신이 지지하는 오성운동의 선전에 "오늘부터 세상이 달라 보인다. 새로운 이탈리아에 대한 희망이 생겼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는 그는 "어떤 정치인들도 그동안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나 복지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오성운동은 대표부터 우리와 비슷한 또래여서 기존 정치인들과는 다를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작년 9월부터 오성운동의 대표는 나폴리 출생의 31세 대학 중퇴자인 루이지 디 마이오가 맡고 있다. 오성운동이 만약 정부 구성 권한을 갖게 되면, 그는 이탈리아 사상 최연소 총리가 된다.
30대 중반의 식당 종업원 알레산드로는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정치인들은 다 똑같이 도둑놈들이라 투표는 하지 않았다"면서 "집권 세력이 바뀐다고 해서 큰 변화가 생기리라는 기대는 없지만, 그나마 의원 월급을 줄이겠다고 하는 오성운동이 승리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밀라노에 거주하는 70대 연금 생활자 에르마노는 이번 선거 결과를 '재앙'(disastro)이라고 부르며, "걱정이 돼 어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오성운동은 무능력한 집단이며, (대학을 중퇴한) 디 마이오는 학교부터 가야한다. 인종주의자인 살비니에게 그렇게 많은 표가 간 것도 우려스럽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결국 정부 구성이 어려워져 재투표로 가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신문 판매대를 정리하고 있던 40대 후반의 여성 베아트리체는 "선거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처럼 경험과 능력이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며 "로마를 점점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시장을 보고도 사람들이 오성운동에 표를 준 걸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성운동 소속의 비르지니아 라지 로마 시장은 2016년 6월 지방선거에서 기성정치 심판론에 힘입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그의 취임 이래 1년 반 동안 쓰레기 수거난, 열악한 대중교통 문제 등 로마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개선될 기미 없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예술가이자 대학 강사인 50대 남성 파스콸레도 이런 생각에 동의했다. 그는 "오성운동은 경험도 능력도 없다. 오직 불평과 비판만 있을 뿐"이라며 "로마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는 세력이 이탈리아 전체를 어떻게 끌고 간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의구심을 표명했다.
그는 이어 "이탈리아 사람들은 준비되지 않은 포퓰리즘 세력에게 나라를 맡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곧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이로 인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이번 선거가 줄 수 있는 유일한 혜택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40년 전 가족과 함께 콩고에서 이주한 50대 아파트 경비원 장 폴은 "가장 상식적인 공약을 제시한 민주당을 뽑았다"며 "저소득층에 730 유로씩 주고, 각종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식의 거짓말 공약에 현혹된 사람들이 유감스럽다. 지켜지지도 않을 약속을 믿고, 책임감 없는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긴 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불법 이민자들과 난민을 모두 본국으로 송환하겠다는 우파연합의 공약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건너와 정착한 사람들이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30대 초반 회사원인 아녜제는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기존 정치 세력에 크게 실망하고, 저항하려 싶어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라를 발전시킬 다른 비전 없이 포퓰리즘만 내세우는 정당들을 이렇게나 많이 지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오성운동이 인기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을 뽑지 않은 나머지 70%는 실행 능력 없이 말만 앞세우는 오성운동을 정말 싫어한다"고 귀띔했다.
그는 또 "이번 선거에서 지역별, 세대별, 계층별로 표가 확연히 갈린 것도 걱정스럽다. 이탈리아는 이제 내부적으로 통합이 되기 어렵다는 신호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빈곤한 남부는 오성운동,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중부는 민주당, 부유한 북부는 우파연합으로의 표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또한, 젊은층이나 빈곤층은 오성운동과 극우, 중산층은 좌파연합, 노년층은 우파에 표를 주는 경향도 감지됐다.
ykhyun14@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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