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론자가 된 철학자 한병철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의무"

입력 2018-03-13 07:30   수정 2018-03-13 09:10

환경론자가 된 철학자 한병철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의무"
김영사 '땅의 예찬'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현대사회에 대한 통찰력 있고 날카로운 비판을 해왔던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환경론자가 되어 돌아왔다.
한국과 독일에서 최근 동시에 출간된 '땅의 예찬'은 저자가 3년 동안 정원을 일구며 겪은 일을 담담하게 풀어낸 책이다. 철학자 한병철을 알린 '피로사회', '투명사회', '타자의 추방' 등과 비교하면 주제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저자가 정원 가꾸기를 시작한 이유는 어느 날 땅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 정원을 '비밀스러운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이라고 명명하고는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정원은 저자에게 가르침을 선사하고 감각을 되살려주는 공간이다. 그는 온갖 정보와 쾌락으로 가득한 컴퓨터 모니터보다 정원이 더 많은 세계를 품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디지털 세계에서 잃어가는 현실감을 회복시켜 준다는 점도 정원의 매력이다.
"정원에서는 무엇보다도 몸으로 계절을 느낀다. 빗물받이통에서 떨어지는 물의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몸속 깊이 파고든다. 하지만 거기서 느끼는 고통은 좋은 것,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감각의 회복은 시간과 존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식물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다. 오래 관찰해야 작은 변화를 감지할 수 있지만, 기다림은 불확실하다.
저자는 정원을 구원의 공간으로 규정한다. 정원사의 사랑하는 눈길, 사랑을 담은 인식이 잊힐 수 있는 식물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아닌 다른 대상, 즉 '타자'에 대한 관심을 끌어낸다.
전작 '타자의 추방'에서 현대 인류는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타자'에 대한 두려움에 둔감해진 탓에 위기를 겪고 있다고 주장했던 저자는 신작을 통해 사회 문제의 해결책으로 정원, 나아가 자연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는 땅에 대한 경외심을 모조리 잃어 땅을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고 지적한 뒤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의 절박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 뛰어난 것이니 말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편 이번 책은 그간 한병철의 책을 대부분 출판한 '문학과지성사'가 아닌 '김영사'가 펴냈다. 저자는 지난해 3월 '타자의 추방' 출간 직후 서울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사진을 찍고 박수를 치는 참가자에게 막말을 하고 기행에 가까운 행동을 해 논란을 일으켰고, 이에 대해 문학과지성사가 사과한 바 있다.
'땅의 예찬' 후반부는 일기 형태로 돼 있는데, 공교롭게도 저자가 당시 서울에 머무를 때의 경험을 적은 글이 있다.
그는 병상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고 적은 뒤 '서울의 거룩한 산'인 인왕산에 올라 "이곳 사람들은 돈을 신으로 모신다. 땅, 아름다움, 선은 사라져 완전히 파묻혀버렸다"고 비판했다.
김영사 측은 "저자에게 1년 전 사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며 "신간과 관련한 강연회 개최 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안인희 옮김. 184쪽. 1만3천원.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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