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딛고 이국땅에서 쌓아올린 이성자의 추상화업

입력 2018-03-20 11:18   수정 2018-03-20 14:49

그리움 딛고 이국땅에서 쌓아올린 이성자의 추상화업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서 대규모 회고전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과천=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나이 서른셋의 한 여성이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결혼생활 12년 만의 파경, 어린 세 아들과의 생이별, 부산 피란생활에서 겪은 전란의 참혹함으로 더는 이 땅에서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도 몰랐던 이국땅에서 그가 새롭게 삶을 살아내도록 끌어준 것은 그림이었다.
동양적 사유 아래 한국적 소재를 서양화 기법으로 풀어낸 추상화가 이성자(1918~2009) 이야기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성자 회고전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22일 개막한다.
1990년도 작품에서 따온 전시 제목은 지구 반대편 한국과 프랑스를 오갔던 작가의 행적뿐 아니라 동서양을 아울렀던 작품 세계를 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와 판화 등 127점과 아카이브가 나왔다. 전시는 시기별 대표작을 1950년대 '조형탐색기', 1960년대 '여성과 대지', 1970년대 '음과 양', 1980년대부터 작고 전까지인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등 네 주제로 나눠 소개한다.
'조형탐색기'는 의상 디자인 공부부터 시작한 작가가 다양한 조형 실험 끝에 추상을 파고들기 시작한 시기를 보여준다. '천사의 땅'(1958)은 화면의 구축, 언어를 초월하는 기호를 담은 대표적 수작이다.
한국에서 미대를 나오지 않았던 작가는 한국보다 프랑스 화단에 먼저 알려졌다. 그의 작품을 먼저 알아본 것도 프랑스 화상이었다. 점차 작가로 인정받으면서 화업도 나날이 발전한다. '여성과 대지' 시기에서는 "나는 여자이고, 여자는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대지"라는 작가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1965년작 '오작교' 앞에서 발걸음이 자연히 오래 머물게 된다. 모국과 가족, 특히 세 아들과 연로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53년 전 서울대 교수회관 전시에서 이 작품을 본 조병화는 같은 제목의 시를 바쳤다. "일 년에 한 번/ 만났다 헤어지는 사랑을 위한/ 하늘의 다리// 이것은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만 놓이는/ 동양의 다리다// 그리움이여/ 너와 나의 다리여."



작가는 그즈음 15년 만에 귀국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연 첫 한국 개인전, 훌쩍 자란 아이들과의 해후, 어머니 죽음 등을 거치면서 한결 자유로워졌다. '음과 양' 시기 작품에서도 치밀한 터치는 사라지고 자유로운 선과 원의 형상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공간에서는 30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이후 작고할 때까지 제작한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시리즈와 '우주' 시리즈가 새롭게 나온다. 이성자가 "내 인생의 완성을 시도한 작품"이라고 칭했던 프랑스 남부 투레트 작업실 '은하수'를 본뜬 아카이브 공간에서는 작가 인터뷰를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던 한국 여성 미술가들을 연구하고 조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전시는 7월 29일까지. 문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 02-2188-6000.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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