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년 역사의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아시아 최초 제1 무용수
파리서 막 내린 드라마발레 '오네긴' 주역 타티아나로 열연…성공리에 공연 마쳐
연습·연습·연습…"다른 것에도 관심 가져보려 했지만 잘 안 되더라"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발레 외에는 특별히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재미있는 것도 없어요. 쉴 때도 다른 발레 공연을 보는 게 좋아요. 춤은 제 삶 자체입니다."
발레리나 박세은(28)은 지독한 연습벌레로 유명하다. 연습 중에 이마가 찢어져 바닥이 피로 흥건해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어도 그저 최소한의 휴식만 취한 채 무대에 올라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마는 근성의 소유자다.
세계 최고 무용수들이 모인 프랑스 국립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도 초고속 승급을 거쳐 주역급인 제1무용수(프르미에르 당쇠즈·premiere danseuse)로 활약 중인 박세은을 지난 20일(현지시간) 발레단 옆의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메인 공연장인 파리 중심가의 팔레 가르니에(Palais Garnier)에서 2월 초부터 3월 초까지 한 달간 이어진 오네긴 공연을 마친 뒤 잠시 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박세은의 여리고 유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조곤조곤한 말투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는 고독한 예술가의 영혼이 느껴졌다
'오네긴'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1831)을 원작으로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창작한 드라마 발레다.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청년 오네긴과 순진한 시골 처녀 타티아나의 비극적인 사랑이 차이콥스키의 서정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박세은은 이번 '오네긴' 공연에서 여주인공 '타티아나' 역을 맡아 총 21회 공연 중 5회에 걸쳐 열연했다.
그가 평소 꿈에 그리던 역할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만큼, 오네긴은 박세은에게 중요한 작품이다.
하지만 1월의 첫 리허설 때 갈비뼈 연골이 부러지고 공연 직전 종아리 근육 부상까지 입으면서 초반부에 출연하려던 계획이 종반부로 연기되는 등 곡절이 많았다.
박세은은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ce) 상의 올해 최종후보에도 올라가 있다.
348년 역사의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도 아시아 무용수로는 최초로 프르미에르 당쇠즈까지 오른 그이지만, 큰 상이나 에투알(수석무용수) 승급 등에 대한 기대는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연습에 열중하는 것이 자신의 마인드 콘트롤 방법이라는 박세은의 얘기를 좀 더 들어봤다.
다음은 박세은과의 문답.
--오네긴 공연 잘 봤다. 연습 때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했다고 들었는데, 공연 때는 괜찮았나.
▲1월 2일 첫 리허설 때 파트너가 나를 들어 올리다가 갈비뼈 연골이 부러져 열흘을 쉬었다. 원래 내가 주역인 공연은 첫 회부터였는데 부상 때문에 후반부로 미뤘다.
다쳤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타티아나는 오랫동안 꿈꾸던 배역이다. 병원에 가서 진단사진을 찍고 통곡을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통증만 참을 수 있다면 공연은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열흘을 쉬면서 어느 정도 회복했고 공연 직전에는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종아리 근육을 다쳐 또 닷새를 쉬면서 마음이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공연을 마쳐서 다행이다.
--부상이 그렇게 잦은가.
▲몇 년 전 마지막으로 다친 뒤 괜찮았는데 이번 공연 앞두고 잇따라 다쳤다. 어찌 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공연 두 달 전부터 연습과 다른 공연(돈키호테)을 반복해 몸을 혹사하다시피 했다. 작년 9월부터 거의 하루도 쉬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인 춤을 추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데 연습과 공연량이 너무 많아 안 다칠 수 없는 상황까지 간 것 같다.
--2015년에는 연습 도중 파트너의 구두 굽에 이마 부분이 부딪혀 찢어지기도 했는데. (박세은의 이마에는 엷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면 미간에 세로로 꽤 긴 흉터가 남아있었다.)
▲현대 발레 작품을 연습하다가 이마 다쳤는데 피가 솟구쳤다. 바닥이 피로 흥건해질 정도였다. 동료들이 수건으로 닦고 나도 울고 동료들도 울고 패닉상태였다. 6㎝를 꿰맸다. 2주 쉬고 피부색 테이프로 붙인 뒤에 공연했다. 워낙 활동량이 많은 작품이라 상처가 낫지 않은 상태에서 땀을 많이 흘렸다. 그래서 이렇게 흉이 많이 남았다. 그래도 공연은 참 재미있게 했다. 그 작품을 다음 달 말에 또 한다.
--오네긴의 주역 타티아나로 발탁됐을 때의 얘기를 좀 해달라. 어떤 작품이고 왜 이 작품을 그렇게 하고 싶었나.
▲주역이 됐다는 걸 알았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공연 3주 전 오네긴의 라이선스를 가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클래스에 참관하라는 이메일이 우리 발레단의 전 단원들에게 왔다. 그때부터 무슨 옷을 입을지 어떻게 춤을 추면 잘할지 고민했다. 이후 우리 발레단 감독님의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리드 앤더슨 예술감독을 소개해주겠다면서 나오라고 하더라. 나가서 앤더슨 감독님을 봤는데, 대뜸 키를 물었다. 167㎝라고 답했더니 내 볼을 한번 살짝 꼬집고 웃으시며 가셨다. 그게 다였다. 그때부터 느낌이 좋아서 기대를 조금 하긴 했다. 두 번째 조연인 '올가' 역만 맡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그러다가 발레단 인터넷 게시판에 내가 주역이 됐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꿈 같았다.
--오네긴을 왜 그렇게 좋아하나.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아주 좋아한다. 백조의 호수도 좋아하고 오네긴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오네긴은 한국에서 10여 년 전쯤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으로 처음 봤는데, 너무 좋아서 충격적일 정도였다.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의 첫 공연도 바로 오네긴이었다. 그때는 대타로 들어갔고, 2013년에는 군무로 전 막에 참여했다. 그리고 5년 뒤 꿈에 그리던 주연을 맡았다.
--공연에서 춤은 물론 감정선을 잘 살리는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퍼포먼스에 만족하나.
▲이런 큰 공연을 하고 나면 아쉬움이 더 크다. 참여한 공연 중에 연습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공연이었다. 주역이 되고서 연습을 정말 많이 했고, 빨리 무대에 오르고 싶었다. 갈비뼈와 종아리 부상이 있었지만, 충분히 연습했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이 춤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연기를 강조해서 많이 연습했다. 만족하지만 조금 아쉽다. 예술가가 자기 작품이나 공연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최선을 다해서 후회는 없다.
--발레리나는 화려하지만 고된 삶인 것 같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 때는 어떻게 이겨내나.
▲기다리면 때가 온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묵묵히 기다리는 것을 잘한다. 역할이 오지 않아도 다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열심히 연습할 뿐이다.
--발레 외에 취미는 없나.
▲없다. 연습하거나 다른 발레 공연을 보는 것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져보려 노력해봤는데 잘 안되더라. 파리에 7년째 살고 있지만, 에펠탑에도 한번 못 올라 가봤다. 발레 생각만 하다 보니…
--오네긴 공연 후 휴가는 어떻게 보냈나.
▲어머님이 한국에서 오셔서 함께 독일 여행을 다녀왔다. 슈투트가르트에 가서 발레 '고집쟁이'를 봤다. 그 외에는 거의 매일 발레단에 나와 연습했다. 무용가 피나 바우슈가 이런 말을 했다. 춤추지 않으면 무용수들은 길을 잃는다고. 그 말이 마음 깊이 박혀있다. 춤을 출 때 가장 행복하고 마음이 편하다. 내가 출 수 없을 땐 춤 공연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다른 한국 출신 무용수들에게는 본인이 우상일 텐데. 어떻게 지내나.
▲이번에 정단원이 된 윤서후와 준단원 강호현이 함께 있다. 어리지만 생각이 깊고 기특하다. 나를 잘 따른다. 이 친구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다. 내가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다. 그렇다고 내가 특출 나다고 여기진 않는다. 다만 먼저 이 길을 갔을 뿐. 나도 한국 친구들이 있어서 참 든든하다.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는 '브누아 드 라 당스' 후보에도 올랐는데.
▲무용수로서 꿈같은 일이라 감사할 뿐이다. 내가 애착을 갖고 연습한 작품 '주얼'(Jewels)의 다이아몬드 역으로 올라 더 기쁘다. 6월 5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에 참가하고 거기서 수상자가 결정된다. 기대는 하지 않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그저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연습에 전념할 뿐이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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