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한국전쟁 속 소외 아동 보살피며 해외입양 힘써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늘 아버지의 정이 그리웠습니다. 부모를 잃은 혼혈아·고아들을 마주하고 외면할 수 없어 그들의 아버지가 되기로 했습니다."
보육원 '성 원선시오의 집' 원장인 서재송(90) 옹은 젊은 시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온갖 고초를 당한 '고난의 세대'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시기에 소외된 혼혈아·고아들을 보살피며 해외입양에 힘썼다. 그를 거쳐 간 입양아는 자그마치 1천600여 명에 달한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당시 행정구역상 경기도 부천시에 속해 있던 덕적도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낸 그는 서당과 보통학교(오늘날 초등학교)에서 공부하며 성장하다가 12세 때 친형이 있는 인천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잠수함 제조장과 조병창(무기공장)에 강제징용되는 등 일제의 수탈을 겪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누렸다.
1950년에는 국립부산수산과학대학(현 부경대 수산과학대학)에 진학해 청운의 꿈을 품었지만, 같은 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학도병으로 흥남철수와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전하면서 다시 고난을 겪었다.
한국전쟁 뒤 육군 현역병으로 전역한 그는 덕적도로 귀향해 교사·이장·덕적면 서기관·공소회장(천주교 신부 대리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일생일대의 인연을 만난다.
그는 24일 "1966년 미국인 최분도 신부가 덕적도 성당 신부로 왔다. 최 신부는 질병이나 조난사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내 집에 데려왔다"며 "부모 없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보육원 '성가정의 집'을 꾸리고 아이들을 아끼고 보살폈다"고 설명했다.
서 옹은 성가정의 집이 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보육원 '성 원선시오의 집'과 통합되자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혼혈아·고아들의 해외입양에 나섰다.
그는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거나 기지촌에서 혼혈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사회에 냉대를 받았다. 이들이 사랑 속에서 성장하려면 해외입양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며 "대부분 미국 가정으로 입양된 혼혈아·고아들은 현재 교수·의사·사업가·각계 전문가 등으로 성장했다"고 했다.
한국전쟁의 흔적이 점차 사라지면서 혼혈아·고아들이 줄어들자 해외입양도 감소했다. 소외된 아이들의 안식처였던 성 원선시오의 집은 1994년 폐원됐다.
서 옹은 그러나 자신을 거쳐 간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놓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입양 가정을 방문해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봤다. 부모를 찾는 아이들에게는 보관하고 있던 입양 기록을 내줬다.
그가 보관하고 있던 해외입양 기록들은 현재 한국이민사박물관으로 옮겨져 '한인 이민의 역사'로 전시될 예정이다.
정부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살피고 입양문화 정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지난해 서 옹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그는 "안타깝게도 입양된 모든 아이가 다 잘 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다"며 "힘이 닿는 한 이 아이들을 끝까지 보살피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tomatoy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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