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활자와 근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목판 인쇄술과 활자의 발명은 동양이 서양에 앞섰다. 하지만 지식의 전파 속도는 서양이 동양보다 빨랐다.
서양에서 인쇄술은 지식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정치와 종교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역할을 했다. 동양은 그 반대였다. 인쇄술이 체제 유지의 조력자였고, 변화를 거부하는 요인이 됐다.
철도와 이양선(異樣船·조선 후기에 출현한 외국 선박)을 주제로 학술서를 썼던 박천홍 아단문고 학예연구실장이 조선에 근대식 인쇄기와 활자가 들어오면서 일어난 변화를 조명한 책 '활자와 근대'를 펴냈다.
명조체 한자 활자와 발로 밟아 움직이는 족답(足踏) 인쇄기가 수입된 시기는 1883년이다. 일본 도쿄에 있던 박영효 공사가 인쇄기 두 대를 구매해 조선으로 보냈다.
인쇄기와 활자 도입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창간으로 이어졌다. 서울 중구 을지로 2가에 있던 박문국이 열흘마다 신문을 발행했다. 조선의 전통적인 홍보 매체였던 조보(朝報)가 물러나고 바야흐로 신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본 신문인 '시사신보' 1884년 1월 25일 자를 보면 조선은 한성순보 3천500여 책을 인쇄해 3천 책은 지방으로 보내고, 200책은 도읍에 팔아넘겼다. 나머지 300책은 일반 독자에게 30문에 판매했다.
저자는 "당시 인구를 한성순보 발행 부수로 나누면 1천894명당 1부에 해당한다"며 "교육 수준과 문맹률, 통신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대단히 많은 편"이라고 평가한다.
국내 최대 규모의 국립 인쇄출판기관이었던 박문국은 단행본도 제작했다. 국한문체 단행본인 '내각열전'을 비롯해 영국에서 나온 연감을 번역한 '열국정표', 농업 서적인 '농정촬요' 등을 인쇄했다.
지면에 목판보다 더 많은 글자를 담을 수 있는 근대 인쇄술을 통해 신문과 책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전파되는 지식의 양은 엄청나게 늘었고, 지식 경쟁이 촉발됐다.
아울러 왕족이나 사대부가 쓴 글자 대신 하층의 기독교 신자들이 쓴 글자를 표본으로 만든 활자가 유통됐고, 책이 다루는 주제도 다양해졌다.
저자는 이 같은 변화가 조선의 성리학 절대주의에 균열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전통적 지식체계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생산되고 집적된 학문과 저작만을 수입했던 조선이 여러 경로로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게 됐다"며 "조선을 지배한 성리학은 외래의 이질적 사유와 지식체계에 맞서야 했다. 도전받지 않던 지식과 사상이 비교와 검토, 회의와 논쟁의 대상이 됐다"고 강조한다.
너머북스. 536쪽. 2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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