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盧 정권서 진상규명 추진되다 MB·박근혜 정권서 진전 없어
진보·보수 관계없이 인정할 평가 있어야…올바른 이름도 시급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70년 전 제주4·3의 최대 비극은 해방 이후 치열한 이념 격돌의 한 가운데에서 무고한 제주도민 수만 명이 스러져 갔다는 점이다.
1948년 4월 3일 좌익 세력의 무장봉기 당시 무장시위대와 군·경찰 및 우익 단체들은 서로를 '통일 반대 세력'이나 '빨갱이'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눴다. 이후 이런 흐름은 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처럼 섬 전체를 집어삼켰다.
이념 대결이 가져온 슬픈 역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시작된 진상규명 작업에까지 그 그림자는 길게 드리웠다.
◇ DJ는 특별법·盧는 사과…MB·박근혜 정권에선 '뒷걸음질' 비판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와 2000년대 초 노무현 정부는 금기시됐던 4·3을 수면위로 올려놓고 진실규명의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골자로 한 '4·3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폭도라는 누명을 썼던 이들이 정부로부터 희생자 결정을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제주도를 찾아 국가 권력의 잘못이라며 직접 사과했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여간 제주4·3에 대한 정부의 접근은 사뭇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4·3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을 심사·결정하는 '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 폐지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어 4·3 진상조사보고서 수정 등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3위원회는 제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단 한 차례 열리는 데 그쳤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부터 시작된 4·3 유해발굴사업은 2011년부터 국비가 반영되지 않아 중단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4·3희생자에 대한 재심사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대선 공약에 따라 4·3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지만,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폭도까지 정부가 추념해야 하느냐"는 보수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2015년 본격적으로 4·3희생자 재심사 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또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재임 기간 4·3 희생자 추념식에 한 차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4·3 희생자와 유족들에게서 두 전직 대통령 재임 기간이 '잃어버린 9년'이었단 말이 나온다.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은 "4·3을 '공산주의 폭도들의 소행'이라 헐뜯는 보수단체 문제 제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극에 달했다"며 "4·3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남은 과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4·3의 시곗바늘은 오히려 거꾸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 "4·3 완전해결 약속" 문재인 정부에 유족 기대감 커져
보수정권 9년여 기간에 실망한 4·3 관계자들은 문재인 정부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했고 '사람이 먼저'라는 점을 강조한 정부라는 점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대선 후보 자격으로 제주를 찾아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구체적 공약으로 4·3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유족 신고 상설화 및 배·보상, 수형인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생활보조비 등 실질적 지원 확대, 4·3 유적 보존 및 희생자 유해 발굴, 4·3특별법 개정 등이다.
'제주4·3의 완전한 해결'을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2014년 서면회의로 단 한 차례만 열렸던 4·3위원회를 지난해 7월 3년여 만에 개최, 희생자 추가 신고접수와 암매장 유해발굴 사업의 계속 추진과 지원을 약속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추가 신고접수가 올해 1월 1일부터 이뤄지고 있고, 중단됐던 유해발굴 작업이 다음 달부터 당시 학살현장이었던 제주공항을 포함한 5곳에서 재개된다.
유족들은 "4·3을 직접 겪은 희생자들 대부분이 고령으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면서 "70주년을 맞는 올해가 희생자들의 한을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 정권 관계없이 인정할 역사적 평가 필요
무엇보다 앞으로는 4·3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정부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재단돼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4·3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70주년을 맞은 올해까지도 우리 사회에선 여전히 4·3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존재한다.
기념사업회와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지난해 12월 특별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4·3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상과 이념의 잣대로 평가하거나, 당리당략 또는 보수와 진보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며 "국가의 부당한 폭력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들의 고통을 헤아리려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한 것은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4·3에 대한 정명(正名·올바른 이름 찾기) 논의는 이런 점에서 시급한 과제 중 하나다.
애초 '폭동'에서 '학살',' 항쟁'으로 변모해 왔지만 명확한 성격 규정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추가적인 조사와 연구,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통해 풀어야 할 숙제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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