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 비정상' 내건 국정교과서, 혈세 40억쓰며 위법·꼼수 강행

입력 2018-03-28 11:00   수정 2018-03-28 11:32

'혼이 비정상' 내건 국정교과서, 혈세 40억쓰며 위법·꼼수 강행

4년 만에 관련자 대거 수사의뢰·징계…7천500권 배포된 후 휴짓조각


(세종=연합뉴스) 고유선 기자 = '바른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던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이 위법행위와 밀어붙이기식 행정으로 점철된 것으로 나타났다.
40억원 이상을 들여 만든 국정 역사·한국사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읽히지 못한 채 당시 청와대와 교육부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의뢰와 징계로 마무리될 전망이다.

◇ "바른 역사 못배우면 혼이 비정상" 한마디에 교육부 '헛짓'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의 시작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3년 교학사 교과서 사태 이후 청와대와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역사교과서의 좌편향성을 지적했다.
그 해 10월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교과서 검·인정 체제 강화를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언급했고, 2014년부터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공론화됐다.
공론화 과정에는 여론 조성을 위해 교육부가 개입했다.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관련 여론조사를 다른 기관에 의뢰하면서도 설문문항을 직접 작성·검토했고, 기고문을 직접 작성한 뒤 기고자를 섭외해 언론에 국정화 찬성 의견을 기고하기도 했다. 교육부는 21명 규모의 국정화TF도 비밀리에 설치했다.
안전행정부와의 사전 협의 등 한시조직 절차에 대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 '행정기관의 조직과 정원에 관한 통칙'을 위반한 비밀TF 성격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게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이다.
국정화 추진 계획은 이후 세월호 참사 등으로 주춤했지만 2015년 10월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행정예고를 하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박 전 대통령은 교육부가 국정 전환을 발표한 뒤 열린 국무회의에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며 국정화에 힘을 실었다.
행정예고 기간에는 '차떼기' 여론조작이 진행됐다.
행정예고 마지막 날인 2015년 11월 2일 오후 11시께 일괄 출력물 형태의 의견서가 교육부에 제출됐는데 진상조사위가 의견서 677건을 무작위로 골라 확인(응답 425건)한 결과 찬성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밝힌 이들은 62%뿐이었다.

예산 역시 불투명하게 확보돼 위법하게 집행됐다.
진상조사위는 교육부가 국정교과서 관련 예산을 2015년 10월 13일에 확보한 것으로 파악했다. 교육부가 기획재정부에 예비비를 신청한 지 하루 만이다.
예비비 44억원 가운데 24억8천만원이 홍보비로 쓰였는데 진상조사위는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주재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국정화TF가 집행하면서 국가계약법과 총리령 등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 비밀·졸속 편찬 지적에도 최종본 발행 고집
국정화 행정예고 직후인 2015년 11월 교육부는 국사편찬위원회를 편찬 책임기관으로 지정해 교과서 개발을 위임했다.
하지만 별도의 직제 개정 없이 이뤄진 것이라 책임소재가 모호하고, 위임 이후에도 교육부가 교과서 편찬에 계속 관여했다고 진상조사위는 지적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후 공모로 16명, 초빙으로 21명의 집필진을 선정했다.
진상조사위는 행정예고 기간에 이미 집필진이 40%가량 선정돼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청와대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집필 계약은 중학교 역사 ①·②와 고등학교 한국사 등 총 3개 팀으로 체결했지만 실제 집필은 시대사별로 이뤄졌다.
신변 보호를 명분으로 집필진은 비밀에 부쳐졌고, 현대사 분야 집필진에는 역사학 전공자가 없었다.
집필료의 경우 국사편찬위원회가 초등 국정 사회교과서 집필료의 4배 수준으로 지급했는데 진상조사위는 이것이 '1인당 3천만∼4천만원 정도는 집필료로 줘야 한다'는 국사편찬위원장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상조사위는 초고가 완성된 뒤에도 교육부가 교과서 검토에 지속해서 개입했고, 내용 수정은 물론 구체적인 문장을 만들어 국사편찬위원회에 수정·보완을 권고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교육부는 이 밖에도 2016년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사업에 국정화 지지자가 선정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고 진상조사위는 밝혔다.


◇ 수사의뢰·징계…교육부에 '국정화' 꼬리표 남기고 마무리
2016년 11월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이 공개된 이후 현대사 분야에 대한 수정 주장이 터져 나왔지만 두 달 뒤인 2017년 1월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최종 승인했다.
하지만 여론은 악화했다.
설상가상으로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이 국정교과서 추진 동력을 크게 떨어뜨리자 교육부는 '2017년 3월부터 모든 중고교에서 국정교과서를 쓰게 한다'는 기존 방침을 철회했다.
대신 국·검정 혼용 체제를 택하고 국정교과서는 연구학교에서만 쓰게 하겠다고 입장을 뒤집었다.
하지만 연구학교 신청학교가 단 한 곳에 그쳤고, 이마저도 법원에서 효력 정지 결정이 나오면서 국정교과서는 연구학교 신청학교에서조차 쓰이지 못하게 됐다.
연구학교를 통한 교과서 사용마저 여의치 않자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활용을 희망하는 학교에 무상으로 배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143개 학교에 7천500권 정도가 배포됐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사흘 만에 교육 분야 첫 번째 업무지시로 국정교과서 폐지를 지시하면서 40억여원을 들여 만든 국정교과서는 휴짓조각이 됐다.
진상조사위는 국정화 과정에서 위법·부당한 행위를 한 청와대·교육부 관계자에 대해 직권남용 등 혐의로 수사의뢰 또는 신분상의 조치(징계·행정처분)를 해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했다.
교육계 관계자는 "교과서를 정치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교육부 역시 국정교과서 사태를 교훈으로 삼아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cind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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