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앨범 '히치' 발매…"사막에 뚝 떨어지고 싶었죠"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한국 사람에게 우리말이 가장 편안한 것처럼 바이올린은 제게 언어보다 더 편안한 도구예요. 작곡할 땐 지나친 익숙함을 피하려고 일부러 바이올린을 배제하곤 해요."
간혹 뛰어난 뮤지션은 천부적 재능에만 기댈 거라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불편함을 추구하는 싱어송라이터가 있다. 강이채(30) 이야기다.
새 미니앨범 '히치'(Hitch)를 낸 강이채와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마주 앉았다. 경남 진주에서 나고 자란 강이채는 6살에 처음 바이올린을 쥐었다. 이후 다른 클래식 전공자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 매일 손가락이 아플 때까지 연습하고 콩쿠르에 나갔다. 때때론 쳇바퀴 같은 일상이 답답했다. 고3이 된 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음악을 만났다. 프랑스의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라펠리(1908-1997)의 음반이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니까 클래식이 아닌 음악을 들으면 혼날 때였어요. 무심코 이상한 리듬을 타게 될까 봐요. 그런데 그라펠리의 연주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클래식 외에 바이올린이 접근할 수 있는 장르를 처음 발견한 거죠. 이후로 우울감이 심하게 왔어요. 다시는 기계처럼 연습을 못 하겠더라고요. 혹독한 연습이 영혼을 깎아놨나 봐요. 부모님 반대가 심했지만 입시 공부를 그만하겠다고 선언했죠. 그리고 재즈 레슨을 신청했어요."
자유롭게 재즈 공연을 다니던 2007년, 강이채는 미국 버클리음대 오디션에 합격했다. 다양한 악기는 물론 작곡과 지휘도 배웠다. 고생도 즐거웠다고 한다.
2011년 졸업 뒤에는 샌프란시스코에 터를 잡았다. 실리콘밸리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100만원 넘는 월세를 감당했다. 밤에는 공연하고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시간은 휙휙 지나갔다. 2014년, 이제까지 보고 배운 걸 진득하게 정리해보자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새까만 긴 생머리를 싹둑 자르고 민트색으로 물들였다. 그는 "염색하고 나니 사람들이 날 '이상한 애'로 봐주고, 기대치를 낮춰주더라"며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모범생의 길을 탈출해 자유분방한 재즈를 선택해놓고, 미국에서도 참 열심히 살았다는 지적에 강이채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귀국 이후로도 그는 많은 일을 벌였다. 2014년 재즈 베이시스트 권오경과 밴드 '이채언루트'를 만들었고, 2015년 개성 있는 여성 뮤지션 크루인 '대한포도주장미연합'에 합류했다. 2017년에는 '디어 재즈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가수 선우정아의 조언에 따라 바이올린을 잠시 뒤로하고 직접 노래도 불렀다.
이번 앨범은 그렇게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주는 휴가와도 같은 작품이다. 앨범명과 같은 '히치'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히치하이킹을 노래하며, 타이틀곡 '안녕'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과 행복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본다. 편안한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잡생각이 부유하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맑아진다.
강이채는 "그동안 일을 정말 많이 했고 쉰 적이 없었다"며 "'히치'를 쓸 때 훌쩍 떠나고 싶었다. 절대자가 나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사막에 똑 떨어뜨려 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어떤 뮤지션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강이채는 "글쎄요"라며 웃음 지었다.
"초등학생 때 TV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를 본 순간부터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는 꿈은 변한 적이 없어요. 바이올린으로 많은 세계를 알게 됐죠. 이제 작곡으로, 프로듀싱으로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하고 싶어요. 할머니가 될 때까지 건강하게요."
clap@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