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당 묘역서 추모식 거행…이수자 여사 "잊을 수 없는 감격"
(통영=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통영에 돌아와 바다에 낚싯줄 던져놓고 온종일 통영 경관에 젖어 고향 냄새를 맡고 싶다는 게 남편이 지닌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눈을 감은 지 23년. 그토록 그리던 고향 땅에 돌아온 작곡가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묻혀 편안히 눈을 감았다.
23년 만에 고향 통영으로 돌아온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추모식이 30일 통영국제음악당 안에 마련된 묘역에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헌다(獻茶), 경과보고, 추념사, 유가족 인사말, 헌시, 합창단 공연, 헌화 순으로 진행된 이 날 행사에는 윤 선생의 딸 윤정 씨와 아내 이수자 여사, 김동진 통영시장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이수자 여사는 "남편은 믿음이나 역사에 어긋나는 일 없이 평생을 살았기에 언젠가 우리나라도 그의 가치를 인정해주리라 생각했다"며 "긴 세월 동안 남편이 나쁘게 선전될 때는 가슴이 아파 눈물 흘렸다"고 차분하게 읊조렸다
이어 "김정숙 여사의 독일 묘소참배가 남편의 유해 이장이 실현되는 계기가 되었다"며 "유해 이장에 힘써준 한국·독일 정부와 관련 기관에 너무 감사하며 이 잊을 수 없는 감격을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덧붙였다.
김 여사는 특히 윤 선생에게 제2의 인생과 예술을 가능케 해준 독일 정부에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인사말을 하는 동안 김 여사는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목이 메는지 중간중간 말을 잇지 못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플로리안 리임 대표는 "100년 전 통영에서 시작된 윤 선생의 여정이 오늘 완료되었다"며 "정치적 목적으로 선생의 업적이 빛바랜 경우도 많았기에 아직 그의 복권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진정한 복권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며 이를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며 "대화와 열린 마음이 그의 복권을 이뤄낼 수 있으며 바로 그때 그가 진정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동진 통영시장은 "오늘 통영음악제 개막에 맞춰 이장을 마무리하고자 추모식을 마련하게 됐다"며 "고향에 선생을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뜻이 다른 시민과는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강조했다.
행사 내내 이수자 여사와 딸 윤정 씨는 소회가 남다른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추모식에 앞서 보수단체인 '박근혜 무죄 석방 천만인 서명운동 경남본부'는 음악당 본관 바로 앞까지 와 묘역 철거를 주장하며 고성과 욕설을 섞어 음악당 관계자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이후 이들은 통영음악당 인근 공터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이어갔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이장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윤 선생 사진을 찢고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이날 보수단체의 행사방해 등 혹시 모를 충돌을 우려해 시와 경찰은 약 200명을 동원, 현장을 통제했다.
베를린을 근거지로 음악 활동을 한 윤 선생은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과장된 동백림(東伯林·East Berlin)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국내에서는 이념성향과 친북 논란 등으로 제대로 음악성을 평가받지 못했지만, 해외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음악기법 및 사상을 융합시킨 세계적 현대 음악가', '유럽의 현존 5대 작곡가' 등으로 불렸다.
그는 1995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타계해 가토우 공원묘지에 묻혔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통영시와 외교부 등의 노력으로 유해는 지난달 말 타계 23년 만에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돌아왔다.
최근 음악당 내 묘역으로 이장될 때까지 유해는 통영시추모공원 내 공설봉안당에 임시 보관됐다.
묘역은 98㎡ 규모로, 유해는 너럭바위 아래 자연장 형태로 안치됐다. 그 옆으로 1m 높이의 향나무와 해송이 심어졌다.
너럭바위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란 사자성어를 새겼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가리킨다.
처한 곳이 더럽게 물들어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마라는 의미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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