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 잘못"이라면서도 피해자 측 질문에는 '모르쇠'·'침묵'
판사 "진정 사죄하려면 기억을 해내야…귀가시키면 증거인멸·도주 우려"
(서울=연합뉴스) 송진원 기자 = 무죄로 누명을 벗은 재일교포 2세 간첩사건의 재심에서 가혹 행위가 없었다고 위증한 옛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 전직 수사관이 재판 도중 재판장의 직권에 따라 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이성은 판사는 2일 위증 혐의로 기소된 고모씨의 재판에서 고씨에게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를 들어 구속 영장을 발부했다.
고씨는 지난 2010년 열린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 윤정헌씨의 재심에 증인으로 출석해 '구타나 협박 등 가혹 행위를 했느냐', '허위 자백을 유도한 사실이 있느냐'는 등의 질문에 "없다"고 위증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날 구속 영장 발부는 검찰의 피고인 신문과 피해자 측 대리인의 신문 과정에서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재판에는 고씨에게 고문을 당한 당사자들도 참석했다.
고씨는 검찰이 과거 피해자들을 고문하고 재심 재판에서 위증한 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자 "그렇다. 모든 게 다 제 잘못이다"라고 인정한 뒤 "동료들, 선배들 생각과 나에게 돌아올 눈총도 무서웠다"고 위증한 이유를 말했다.
이에 이 판사는 "사죄라는 건 받는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돼야 진정한 사죄"라면서 피해자 대리인에게 질문할 기회를 줬다.
고씨는 그러나 피해자 측 대리인이 피해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고문한 사실이 있는지 묻자 "기억에 없다"거나 "제가 안 했다"라는 식의 답변을 이어갔다.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 고문했는지를 묻는 말엔 아예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모습을 본 피해자들은 "이건 사과가 아니다"라고 항의했다.
이 판사는 5분간 재판을 휴정한 뒤 법정에 돌아와 "피고인은 신문 과정에서 잘못을 인정한다고 했지만, 피해자 측이 요구하는 사죄의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피고인은 과거를 기억하기가 매우 고통스럽고 피해자들이 계신 자리에서 기억을 진술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피고인은 기억을 해내야 한다"며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기엔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기억해내는 일이 피고인에게 너무 힘든 과정이라 귀가를 시키면 도주나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여 구속 영장을 집행하고자 한다"며 "피해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사죄가 이뤄지려면 피고인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밝혔다.
이 판사는 아울러 "이 재판에 관여한 모두보다 피해자들이 몇만 배 더 힘든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한다"며 "피해자들이 아픈 과거를 떠나 보내게 도와줄 열쇠는 피고인이 쥐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는 말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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