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소고기는 귀하지 않았다…하루 1천여 마리 도축"

입력 2018-04-09 08:00   수정 2018-04-09 08:34

"조선 후기 소고기는 귀하지 않았다…하루 1천여 마리 도축"
신간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도성의 시전에서 각 고을의 시장, 거리의 가게까지 모두 합해 하루에 죽이는 것이 1천 마리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에 솟값은 날로 뛰어오르고 만들어내는 것은 날로 줄어든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조선 숙종 2년(1676) 1월 14일 생활상을 보면 당시 국가에서 도축하는 소는 하루에 1천 마리를 넘었다. 그런데 이날이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치른 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매일 1천여 마리의 소를 먹어 치웠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기른 소는 얼마나 됐을까. 연간 도살되는 소가 40만 마리에 가까웠을 터이고, 소는 몇 년에 한 번씩 새끼를 낳으니 100만 마리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생태환경사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펴낸 김동진 박사가 쓴 신간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는 조선시대에 매우 인기 있는 음식이었던 소고기를 다각도로 살펴본 책이다.
저자는 18세기 후반 학자인 이덕무(1741∼1793)의 '세시잡영(歲時雜詠)에서 "상등 부자 잡는 소는 두셋, 중등 부자 잡는 소는 하나"라는 대목을 인용한 뒤 부잣집의 소고기 섭취량을 분석한다.
그는 소 한 마리를 잡으면 160∼170㎏에 달하는 고기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상등 부자는 300∼500㎏, 중등 부자는 160∼170㎏의 고기를 연중 소비하기 위해 육포 등으로 만들어 보관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에는 왕이나 부자뿐만 아니라 백성도 소고기를 즐겨 먹었다. 생각보다 소고기가 귀하지 않았던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 후기에 염소나 돼지는 일종의 금기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덕무와 동시대를 산 박제가(1750∼1805)는 "하루가 다 지나도 돼지고기는 팔리지 않고 남았다. 이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소고기가 유난히 많기 때문"이라고 '북학의'(北學議)에 적었다.
소고기는 맛도 좋았지만,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한 식품이었다. 사대부에게는 장수음식, 백성에게는 구황식품으로 인식됐다. 장차 나랏일을 할 유생들이 교육을 받는 성균관은 도성에서 유일하게 소 도축이 허용된 장소였다.
저자는 조선 중기 편찬된 '식료찬요'(食療纂要)에 나온 소고기의 효능도 소개한다. 이 책에는 "소고기를 먹으면 속이 따뜻해지고, 기운을 북돋우며, 비위를 기르고, 골수를 채울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수광(1563∼1628)도 "소고기는 가장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소고기를 즐기는 자는 오래 살았고, 소고기를 멀리하는 자는 단명했다"며 "이 명제는 조선 의학에서 상식이었다"고 강조한다.
소가 구황식품인 이유는 기근이 찾아오면 농사짓는 데 사용한 소를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식량인 소고기는 화폐처럼 거래되기도 했다.
저자는 소고기의 생태환경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리법도 실었다. 고기 말리는 법, 상한 고기의 맛을 돌려놓는 법, 질긴 소고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법 등을 정리했다.
위즈덤하우스. 264쪽. 1만5천원.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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