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유다 작가 소설·그림책…'한영 바이링궐 에디션'으로 해외 소개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친족·아동 성폭력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된 피해자의 내면을 그린 소설·그림책 '코끼리 가면(ELEPHANT MASK)'이 한국어와 영어로 함께 읽는 '한영 바이링궐 에디션'으로 출간됐다.
"코끼리 가면 이야기는 너를 만나 시작되었다. 너는 이야기를 들어 준 첫 사람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성폭력 생존자인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 이야기이다. '나'는 동네 만두집에서 우연히 '너'를 만나 가까워진다. 종종 머릿속이 이상한 생각들로 들끓고 맨발로 거리를 헤매기도 하는 '나'는 주위에서 미쳤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거리를 헤매다 강변에 도착해 강물에 얼굴을 비치니 잿빛 코끼리 얼굴이 나타난다. '나'는 코끼리를 보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다.
"길을 가장 잘 찾는 할머니 코끼리가 우두머리가 되고 수컷들은 열 살만 넘으면 가족을 떠나 산다며. 그래서 말인데, 나는 다시 태어나면 사람 말고 코끼리가 되고 싶어." (33쪽)
주인공의 이름은 '혜경'.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큰 전자회사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테니스 강사로 일하며 세 아이를 길렀다. 그러나 혜경의 여섯 살, 두 살 터울 오빠들은 오빠라고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큰오빠는 주인공이 일곱 살이었을 때부터 몸을 만지기 시작해 점점 더 나쁜 짓을 했고 작은 오빠는 망을 보는 식으로 이를 도왔다. 엄마는 바쁘다는 이유로 자녀들에게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칠천 수백여 일간 폭력의 기억을 제대로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내 비밀, 더 나아가 원가족의 비밀은 조개우물 이야기만큼이나 아득한 것이다. (중략) 내가 범죄 사건의 방관자가 된 이유는 추악한 범인들을 가족으로 여긴 탓이었다. 무거운 비밀을 견디는 대신 나는 닥치는 대로 먹었다. 먹고 먹어서 코끼리처럼 몸이 커지면 세상 어떤 망할 자식도 함부로 덤비지 못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66쪽)
혜경은 나중에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지만, 엄마는 아들들을 감싸고 "세상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될 더러운 이야기"라며 딸의 입을 막는다. 이로 인해 상처가 더욱 곪은 혜경은 마음의 병을 앓게 되고 조증과 울증의 양극성 장애에 시달리며 어렵게 살아간다. 그러다 자신의 아픔에 귀 기울여주는 '너'라는 존재를 만나고서야 조금씩 회복해 나간다. 함께 가해자들을 찾아가 그간 참아온 분노를 터뜨리고 욕을 퍼붓기도 한다.
"새 길이다. 네 덕에 나는 의외로 잘 버텼다. (중략) 우리는 살아남았고 앞으로 더 안녕히 살아갈 것이다." (85쪽)
이 책은 작가 노유다가 실화를 바탕으로 10년 동안 다듬어 만들어낸 작품이다. 기억을 근거로 직접 그린 그림과 가족사진을 더해 어린 날의 아픔과 그 이후의 삶을 생생하게 담았다.
독립출판사 움직씨의 창립작이자 '움직씨 미투(metoo, 나도 겪었다) 시리즈'의 첫 책으로 2016년 출간돼 호평받았고, 최근 '미투' 운동과 함께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작년 여름부터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비교문학과 번역학을 공부한 번역가 김유라와 함께 영어 번역 작업에 들어가 최근 완성했다.
출판사는 바이링궐 에디션을 내며 내용과 디자인, 판형도를 완전히 새로 조정했다고 밝혔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위드유(#WithYou)의 의미로 전국 10여 곳의 동네책방에서 제작 후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출판사는 "올해 타이페이국제도서전을 비롯한 여러 국제도서전과 유럽, 영미 문화권의 독립책방 등지에 '코끼리 가면' 바이링궐 에디션을 배본, 성소수자이자 여성인 작가의 묻히기 쉬운 목소리와 문학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92쪽. 1만1천원.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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