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68세대 아이콘 두치케 피격 50년…베를린의 영원한 기억

입력 2018-04-12 12:02  

독일 68세대 아이콘 두치케 피격 50년…베를린의 영원한 기억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 탕!, 탕!, 탕!
1968년 4월 11일 오후. 서베를린 중심지 쿠담 거리에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나른한 목요일 오후의 푸른 공기를 가른 총격. 나치를 추종하던 20대 미숙련공 요제프 바흐만의 범행이었다.
타깃은 독일 68혁명 세대를 상징하는 학생운동 지도자 루디 두치케였고 총알은 그의 머리와 어깨를 관통했다.
독일사회주의학생동맹 사무실이 있던 쿠담 모퉁이 현장에는 두치케의 신발 한 켤레와 자전거, 그 위에 걸린 손가방만 쓸쓸히 널브러져 있었다.
두치케는 병원으로 옮겨져 수 시간 수술을 받은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11년 후인 1979년 39세의 나이에 후유증으로 숨졌다.
동독에서 자랐지만, 당시 분단 독일의 서독 권역이던 서베를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그는 베를린자유대를 다니며 학생운동을 이끌던 인물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됐지만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평화를 말했고 나치 잔재 청산을 내세우며 민주주의를 열망했다. 모든 기성가치의 전복을 꿈꾼 68세대는 그래서 그를 기억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이 역사적 총격 사건이 일어난 그 장소에 11일(현지시간) 역시나 당시 사건 발생 시각과 같은 오후 4시 30분쯤 수백 명이 모였다. 피격 50년을 기념하며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아들 둘과 딸 하나와 함께 참석한 미국 태생의 두치케 부인 그레첸 클로츠-두치케(76)는 이 자리에서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이 보도했다.
클로츠는 "반(反) 권위주의 운동의 역사는 젊은 세대들도 이해할 수 있게끔 학교에서 필수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녹색당 소속 라모나 포프 베를린 시정부 경제장관은 "1968년 당시 학생저항은 이 세상을 더 열었고 정치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도화선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안트예 카페크 베를린시의회 녹색당 원내대표는 "시민권, 평등, 환경보호 같은 것들은 모든 반동적 힘에 맞서서 방어해야 하는 과거 노력의 대가"라며 "이 반동적 힘들은 오늘날 증오와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우리 사회를 1950년대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정치학자 하요 풍케, 녹색당 창당멤버 밀란 호라체크 같은 명망 있는 인사들이 연설한 뒤 작가 미하엘 슈나이더는 베를린자유대 동료로서의 두치케를 "순수했고, 인간을 어린이 같은 순수함으로 신뢰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러면서 "그것이 사람 보는 안목이 부족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휴머니즘이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는 그들의 더 나은 쪽을 펼쳐 보이는 걸 이해했다"고 덧붙였다.
두치케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이들로 국한되지 않았다.
독일 주요 언론은 거의 예외 없이 두치케 피격 50년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취급했다.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 사설은 독실한 기독교도이자 카리스마 넘쳤던 "완전한 순수"(신학자 헬무트 골비처의 두치케 인물평)인물 두치케는 당시 "반란의 심장"이었다면서 독일이 낳은 세계적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68혁명이 독일에 남긴 것은 무엇이냐를 질문을 생전에 받고서 가장 훌륭한 답변을 한 것이 있다며 그걸 옮겼다.
하버마스의 대답은 딱 두 단어로서 "프라우(여성 호칭) 쥐스무트"였다. 이는 여성정치인 리타 쥐스무트를 일컫는 거였다. 중도우파 기독민주당의 이 정치인은 1985∼1988년 가족, 청소년, 여성, 보건 분야를 담당하는 장관을 지낸 데 이어 1988년부터 1998년까지 연방하원 의장까지 역임했다. 결국, 하버마스는 68세대의 저항이 없었다면 이러한 여성파워가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 어려웠다고 말한 거였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 같은 세계적 정치인이 나치 과거사를 무한참회 한다고 수시로 밝히는 걸 보면서, 흔히들 잊는 것이 있다. 독일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나치 부역자가 총리(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에 오르기까지 하는 나라였다. 정부 부처 공무원 사회에 있는 부역 세력의 숫자는 정확히 헤아리기조차 힘들던 시기도 있었던 독일이다.
그때 학생과 청년들이 용기 있게 들고 일어나 "이건 아니다"라며 기성세대의 '멱살'을 잡았고 강고한 권력블록에 '어깨동무'로 맞섰다. 그러한 역사의 한 페이지 위에는 기민당 전당대회장을 찾아가 '나치, 나치, 나치'를 외치며 키징거 총리의 뺨을 후려친 한 여인도 자리한다. 독일 주류사회의 나치 과거사 경계와 반성은 이들의 저항에 빚진 바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역사의 기억을 위해 주요 시설물과 상징물을 많이 두는 것으로 유명한 베를린. 그곳 베를린자유대는 캠퍼스에 두치케로(路)를 둬 그를 기억하고 있다. 베를린 시내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조성된 건 물론이다. 또 생전에 두치케와 68세대를 그렇게 비판하고 증오한 미디어그룹 악셀슈프링거 사옥은 그 건너편에 두치케 동상이 서는 것을 허용했다.
스포츠 분야 기자가 되어 평온한 삶을 살려 했다는 두치케. 그의 심장은 지금도 베를린 속에서 뛰고 있다.
un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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