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연정구성 협상서 '천덕꾸러기' 전락

입력 2018-04-13 06:00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연정구성 협상서 '천덕꾸러기' 전락
반체제 오성운동 "베를루스코니 버려라"…극우당 동맹 "못버려"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이탈리아 최대 재벌 출신으로 이탈리아 총리를 3차례나 역임한실비오 베를루스코니(81)가 이탈리아 새 정부 구성 협상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지난 달 4일 실시된 총선에서 반(反)난민 정서를 등에 업고 나란히 약진한 두 세력인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과 극우정당 동맹의 결합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전락한 듯한 모습을 보여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케 했다.



세르지오 마타렐라 대통령이 각 정파 수장들을 로마의 대통령궁 퀴리날레로 불러들여 정부 출범 가능성 타진을 위한 2차 협의를 개시한 12일(현지시간)에도 오성운동과 동맹이 주축이 된 우파연합은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를 둘러싸고 다시 한번 날선 공방을 펼쳤다.
오성운동은 새 시대에 걸맞은 '변화의 정부'가 출범하려면 동맹이 베를루스코니를 버려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반면, 동맹은 선거 전 맺은 연대를 깰 수 없다며 오성운동에 무리한 요구를 포기하라고 맞서고 있다.
루이지 디 마이오(31) 오성운동 대표는 이날 마타렐라 대통령을 만난 직후 "(정부 출범을 지연시키는)현재의 교착을 풀기 위한 유일한 해법은 '변화의 정부'가 들어설 수 있도록 베를루스코니가 옆으로 물러나는 것"이라며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번 총선에서는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전진이탈리아(FI) 마테오 살비니(45) 대표의 동맹 등 우파 정당 4개가 손을 잡은 우파연합이 약 37%를 득표해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단일 정당으로는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이 32%를 득표해 창당 9년 만에 최대 정당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어느 정치 세력도 과반 득표에는 실패함에 따라 정부 출범을 위해서는 정당 간 합종연횡이 필수적이다.
정당 가운데 가장 많은 국민들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신들이 새 정부의 중심 축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오성운동은 지난 5년 간 정부를 이끌었던 중도좌파 민주당이나 우파연합 내 최대 정당으로 떠오른 극우정당 동맹과 손잡고 정부를 꾸리기를 원하고 있다.
총선에서 역대 최악의 참패를 당한 민주당의 다수 의견은 연정에 참여하지 않고, 야당으로 남아 당을 근본적으로 재건한다는 데 모아지고 있는 터라, 현실적으로 재선거로 가지 않는 거의 유일한 시나리오는 오성운동과 동맹의 연대뿐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하지만, '깨끗한 정치'를 최우선 명제로 삼고 있는 오성운동은 탈세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고, 증인 매수 등으로 또 다른 재판에 서야 할 처지인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를 부패와 구습의 대명사로 비판하며, 그와는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디 마이오 대표는 아울러 오성운동과 동맹이 연대하면 즉각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라며 동맹에 FI와의 연대를 끊을 것을 종용하고 있다. 두 정당은 강경한 난민 정책, 유럽연합(EU)에 회의적이고, 러시아에 친화적인 성향 등을 공유하는 등 상당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런 까닭에 오성운동과 동맹의 결합은 시장과 EU가 가장 우려하는 조합으로 꼽힌다.
디 마이오 대표는 전날 현지 방송의 토크쇼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정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물러나 달라"고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를 겨냥했다.
오성운동의 거물급 정치인인 알레산드로 디 바티스타 역시 자신의 페이스북에 "베를루스코니는 '절대악'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상징한다"며 오성운동이 베를루스코니와 손잡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살비니 동맹 대표는 오성운동의 이런 요구에 현재까지는 응하지 않고 있다.
살비니 대표는 1차 면담 때와는 달리 이날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 조르지아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FDI) 대표 등 다른 우파연합 소속 정당 대표들과 모두 함께 대통령을 면담한 뒤 "오성운동은 정부 구성 협상에 있어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무리한 전략과 거부를 포기하라"고 말했다.
손자뻘인 디 마이오, 아들뻘인 살비니의 설전을 지켜보며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런 속내를 애써 감춘 채 "우파연합은 총선에서 37%의 표를 얻어, 32%에 그친 오성운동에 앞섰다. 우리의 연대는 굳건하다"고 담담히 말했다.
총리 지명 권한을 쥐고 있는 마타렐라 대통령은 13일에는 상원과 하원 의장, 조르지오 나폴리타노 전 대통령 등 정치권 주요 인사를 차례로 만나 정부 구성 가능성을 모색할 예정이다.
각 정당의 입장에 뚜렷한 변화가 없는 까닭에 이번 2차 협의에서도 뚜렷한 돌파구가 마련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오는 22일과 29일 남부 몰리제 주와 북부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 주에서 각각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는 것을 고려할 때, 각 정당들이 선거를 앞두고 기존 입장을 버리고 한 발씩 양보하기를 기대하기는 더군다나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반군 장악 지역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한 의혹을 받는 시리아 정부군을 겨냥해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군의 공격이 조만간 개시될 가능성이 점쳐지는 가운데 정부 구성에 속도를 내기 위한 마타렐라 대통령의 마음도 급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간 라 레푸블리카는 "마타렐라 대통령은 시리아 사태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빨리 이탈리아에 완전한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부 구성 논의를 서두르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정학적으로 유럽과 중동·북아프리카의 길목에 자리한 이탈리아에는 미군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주요 기지들이 들어서 있어, 완전한 권한을 지닌 정부가 갖춰져야만 시리아가 전쟁 국면으로 진입할 경우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ykhyun14@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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