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폭락, 수확하느니 보상금 받고 폐기"…전남서 1천602농가 신청
(무안=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봄철 수확을 앞둔 전남 무안군 청계면 양파밭에 지난 13일 예초기를 둘러맨 청년 두 명이 나타났다.
엔진 시동 줄을 힘껏 잡아당긴 청년들은 고속으로 회전하는 예초기 날을 앞세우고 밭 가장자리에서 한복판을 향해 파고들어 갔다.
예초기 회전 날이 훑고 간 자리마다 댕강댕강 잘려나간 양파대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짙푸른 양파대 단면에서는 양파를 손질할 때 눈물을 쏟게 하는 매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청년들이 부지런하게 예초기를 돌려대자 들녘에 진동하는 매운 향으로 눈, 코가 알싸했다.
뒷짐 지고 서서 예초기 작업을 지켜보던 청년 농부 박창주(38) 씨의 눈자위가 붉게 충혈됐다.
이날 예초기를 돌려댄 청년들은 남의 밭을 망치러 온 말썽꾼이 아니라 이웃사촌들이다.
저마다 양파를 키우는 이 이웃사촌 청년들의 다른 밭에서도 며칠 새 멀쩡한 밭작물을 엎는 품앗이가 이어졌다.
겨우내 흘린 구슬땀으로 양파밭을 함께 일군 이들은 봄에도 이런 식으로 서로 일을 거들 줄은 예상 못 했다.
이들이 멀쩡한 양파밭을 갈아엎게 된 이유는 엉뚱하게도 단지 풍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질 좋은 양파가 시장에 쏟아져 나온 올해 봄 햇양파값은 폭락했다. ㎏당 1천400원이었던 지난해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당 12만∼15만원씩 주고 사람을 구해 양파를 수확하고 내다 팔면 되레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자 박 씨뿐만 아니라 많은 농부가 차라리 양파를 폐기하고 보상금을 신청하기로 했다.
예초기로 양파대를 자르고 보온용 비닐을 걷어내면 농협 직원들이 나와 현장을 확인하고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후 양파밭을 트랙터가 뒤집으면 폐기 절차가 끝나고 통장에 보상금이 들어온다.
아버지가 평생 일군 밭을 물려받은 박 씨는 올해로 양파 농사 9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는 4년 전에도 어금니를 악물고 양파밭을 엎었다.
겨울 작물인 양파 산지가 재배시설을 중심으로 경기와 충청지역까지 확대되면서 흉작이 들어 물량이 줄어야만 제값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작황과 상관없이 꾸준히 국내로 들어오는 수입산 농산물도 걱정거리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몇몇 농가는 배추, 쪽파, 무, 양배추 등 손이 덜 가면서 비용도 적게 드는 작물로 눈을 돌렸다.
"농사를 두고 도박을 할 수는 없잖아요. 잘하는 게 양파밖에 없습니다. 우직하게 양파 농사만 짓기로 했어요."
박 씨는 대대로 가꿔온 농토를 바라보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14일 농협중앙회 전남지역본부에 따르면 양파 주산지인 전남에서 올해 1천602농가가 햇양파 수확을 포기하고 시장격리(산지폐기)를 신청했다. 재배 면적으로는 972㏊에 달한다.
하지만 전남지역이 배정받은 시장격리 양파 재배 면적은 무안 56㏊, 고흥 45.6㏊, 함평 15㏊, 장흥 8㏊, 신안 7.2㏊, 해남 6.8㏊ 등 139㏊뿐이다.
양파 시장격리 농가가 받는 보상금은 ㏊당 2천49만원으로 책정됐다.
농협전남본부은 개별 면담과 산지 방문을 통해 배정받은 면적 139㏊를 1천602농가에 분배하고 있다.
산지폐기 여부를 확정받은 박 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른 농가에 비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전남도 관계자는 "지난 2∼3년간 작황이 좋지 않아 양파 가격이 잘 나왔다. 그런데 올해는 재배 면적이 15% 정도 늘고 봄비까지 내리면서 작황이 좋아 가격이 오를 여지가 없어 재배농가들이 힘든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
h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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