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뿐인 마을· 세집 건너 빈집…관공서·학교 줄줄이 문 닫아
여든 넘은 어르신 전용 경로당 등장…공동생활도 늘어
(전국종합=연합뉴스) 충북 보은군 회남면 판장1리에 사는 최영한(83) 할아버지는 이 지역 최고령 이장이다. 1990년 도시생활을 접고 낙향한 이듬해부터 28년째 줄곧 이장 일이 보고 있다.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그는 지팡이에 의지하면서도 매달 2차례 이장회의에 참석하고, 군청과 면사무소를 오가면서 주민들의 민원을 챙겨야 한다.
이웃을 대신해 농협에 영농 자재를 주문하고, 몸이 아픈 사람을 보건소까지 데리고 가는 일도 오롯이 그의 몫이다.
이 마을은 하루 세 차례 드나드는 시내버스가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그러나 최 할아버지는 다행히 승용차를 보유하고 있어 버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출입한다. 그가 30년 가까이 이장 자리를 맡는 이유이기도 하다.
◇ 노인 여섯 가구 사는 산골, 3분의 1은 빈집
판장1리는 대청호 기슭의 아담한 산골이다.
댐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50여 가구가 살던 제법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6가구만 남아 있다.
마을 안에 들어서면 반쯤 허물어진 빈집이 3채나 눈에 들어온다. 주인은 있지만, 몇 년째 방치되다 보니 지금은 완전히 폐가가 됐다.
최 할아버지는 "노인끼리 살다가 병이라도 나면 자식을 따라 도시로 떠나는 데, 그게 영영 이별이 된다"고 빈집이 늘어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가 사는 회남면은 충북에서도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이다.
지난달 기준으로 도시지역 아파트 1∼2개 동에 불과한 796명이 살고 있다.
인구 수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연령 분포다.
65세 이상 노인이 293명(37%)인 반면 18세 미만 청소년은 6분의 1에 해당하는 50명에 불과하다.
1975년 5천578명이던 이곳 인구는 10년 뒤 1천857명으로 급감했다.
1980년 대청댐 건설로 마을과 농경지가 수몰되면서 고향을 뜬 사람이 많아서다.
이후로도 젊은층의 도시 유출로 인구는 해마다 10%씩 줄어 1996년 1천 명이 무너지는 등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러는 사이 파출소는 낮에만 문을 여는 치안센터로 바뀌었고, 농협도 인근과 통합돼 지점으로 격하됐다.
전교생 16명의 회남초등학교가 이 지역 유일의 학교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다.
구정자 회남면장은 "관공서, 금융기관, 학교 등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공동체 시스템이 서서히 무너지는 상황"이라며 "최근 귀농이 늘고 있지만, 노인 사망자 수를 따라잡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경북 안동시 녹전면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 인구 1천892명 중 65세 이상이 803명(42%)에 달한다. 출생보다 사망이 많고, 전입보다 전출이 많은 구조여서 해마다 인구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 20명을 웃돌던 출생아 수는 2년 전 4명으로 내려앉았고, 지난해는 한 명도 없었다. 올해 갈현리의 한 다문화가정에서 귀한 아이 울음이 터져 나온 게 그나마 주민에게는 위안거리다.
이 마을 이장 안승하(75) 씨는 "젊은 층은 고사하고 힘쓸 사람이 없다보니 눈이라도 내리면 이만저만 고생이 크지 않다"라며 "지난달 폭설에도 버스 길을 뚫기 위해 나를 포함한 3명이 종일 매달렸다"고 어려운 실정을 전했다.
◇ 분만 산부인과도 없다…젊은층 도시 탈출 악순환
충남 서천군 마서면도 전체 770가구 중 85%(658가구)가 65세 이상 노인들이다.
이 지역 유일 마산초등학교 재학생도 37명에 불과하다.
이곳을 포함한 서천군 인구 평균 연령은 51.8세로 전국 평균(41.5세)보다 열 살이 많다. 3명 중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이다 보니 아이 울음이 귀해졌다.
분만 산부인과가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바람에 임산부들은 승용차로 30여 분 걸리는 전북 군산시로 나가 원정 진료를 하고 있다.
서천군 관계자는 "취약한 분만 환경 등은 얼마 남지 않은 젊은층마저 도시로 내모는 악순환이 된다"고 지적했다
남해 끝자락에 위치한 전남 고흥군 두원면 영동마을도 1970년대 300명을 웃돌던 인구가 지금은 79명(45가구)으로 줄었다. 고령자가 많아 70대는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한다.
주민 상당수가 마늘 농사를 짓는데, 일손이 없다 보니 도시 사는 자녀들의 손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
작년 추석 때는 명절을 쇠러 온 자녀들이 들녘에 나와 마늘 모종을 심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지난 2월 전남도 전체 인구 189만1천 명 중 청년(만18∼39세)은 46만4천 명(24.5%)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22개 시·군 중 고흥(15.7%), 보성(17.4%), 함평(18.2%), 신안(18.3%)군 등 11곳은 20%를 밑돈다.
인구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지역이 늘면서 6·13 지방선거에서도 이 문제는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 고향인 경북 의령군의 출마 후보들은 너나없이 삼성 계열사 유치나 은퇴자 거주 타운 건설 등을 핵심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달 이 지역 인구는 2만7천 명에 불과하다.
◇ "부자·고부 함께 이용해 불편"…여든 살 이상 전용 경로당 등장
노인층이 늘면서 웃지 못할 진풍경도 곳곳에서 펼쳐진다.
보은군은 몇 해 전 80세 이상의 '상노인'만 출입하는 산수(傘壽·여든 살) 경로당 2곳을 설치했다.
60∼70대 젊은 노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뒷전으로 밀려난 어르신을 위한 전용 공간이다.
정상혁 보은군수는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아버지와 아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은 경로당에서 수시로 얼굴을 맞대야 하는 불편을 호소하는 일이 잦다"며 "주민 반응이 좋아 올해 산수 경로당을 1군데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태안군 소원면에도 최근 나이별로 구분 지어 출입하는 경로당을 설치해달라는 건의가 접수됐다.
경로당이 단순한 '사랑방' 기능을 넘어서 노인들의 공동생활공간이 되기도 한다.
충북 옥천군은 겨울마다 5명 이상 합숙 희망자가 있는 경로당에 난방비를 특별 지원하면서 공동생활을 주선한다.
노인들이 제대로 난방 안 된 집에서 지내다가 변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한 조치다.
지난 겨울에는 19곳의 경로당에서 공동생활이 이뤄졌다.
전남도는 이장·통장, 부녀회원, 의용소방대원 등과 취약계층 노인을 1대 1로 매칭해 노인 고독사 등에 대비하고 있다.
2016년 9월 시작한 이 사업에는 1천640명이 참여해 그동안 14건의 신변 이상 신고와 643명을 공적 서비스와 연결해주는 성과를 냈다.
혼자 생활하면서 식사를 거르는 노인을 위해 경로당에 살림 도우미를 파견해 공동급식을 주선하는 사례도 늘어나는 추세다.
작년 한국고용정보원은 앞으로 30년 안에 전국 시·군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84곳, 1천383개 읍·면·동이 사라진다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놨다.
실제로 경북 울릉군 인구는 1만97명으로 1만 명 유지조차 버거운 실정이고, 경북 영양·군위·청송, 인천 옹진, 전북 장수·무주·진안·임실·순창, 강원 양구·화천·양양·고성, 전남 구례, 경남 의령 등 15곳도 3만 명을 밑돌면서 소멸 우려가 커지고 있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농촌 인구 감소와 고령화 문제는 단시간에 해법을 기대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열악한 생활 인프라를 개선하고, 농촌 소득을 끌어올리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조성민 최병길 손상원 이강일 박병기 기자)
bgipar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