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인 맥그린치… '자립'과 '사람다운 삶' 위해 이국땅에 일생 바쳐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예수가 한 소년으로부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 5천명의 군중을 먹인 것을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 한다. 제주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수많은 업적을 남긴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90·한국명 임피제)가 지난 23일 세상을 떠났다.
27일 오전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성이시돌 삼위일체 대성당에서의 장례미사를 앞두고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 발자취를 당시 사진과 함께 재구성해 선보인다.
1928년 6월 아일랜드 레터켄에서 태어난 맥그린치 신부는 1951년 12월 아일랜드 성 패트릭 신학교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추지 않던 1953년 4월 선교의 부름을 받고 부산을 통해 한국땅에 첫발을 디뎠다.
1953년 4월부터 광주대교구 순천본당 보좌로 한국에서의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54년 4월 승격된 제주 한림본당에 부임하면서 제주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그 당시 제주는 4·3과 한국전쟁의 여파로 피폐한 상태였고, 도민들은 저마다 가난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주임신부라는 직책을 맡고 한림에 왔지만 신자 수가 30명 정도였던 한림에는 본당 건물조차 없었다.
그는 그해 5월 전임 신부가 마련해 둔 100평의 땅에 가진 돈을 털어 350평을 보태 성당을 짓기로 했다.
그때 제주에서의 첫 기적이 일어났다. 자재가 없어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목재를 가득 싫은 미군 물자 수송선 산 마테오(San Mateo·9천t)호 한림읍 용운동 해안에 좌초했고, 신자도 아닌 주민 수백 명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필요한 목재들을 공사 현장으로 옮겨다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목재 외의 다른 자재들은 우연히 미군 군종 신부가 모금해 준 돈으로 마련했다.
신자들과 삼삼오오 모여 마을 어귀 팽나무 아래서 미사를 드리던 맥그린치 신부는 1955년 7월 성당 공사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성당 건립 과정에서 도민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그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목축업이 발달한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양돈업을 떠올렸다. 당시 제주에서는 흑돼지를 변소에 키우다 보니 제대로 양돈을 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는 인천에서 새끼를 밴 요크셔 돼지 한 마리를 구입해 한림까지 가져왔다. 이 돼지는 훗날 연간 돼지 3만 마리를 생산하는 동양 최대 양돈목장의 기초이자 제주 근대 목축업의 기반이 됐다.
1957년 그는 성당에 나오는 청소년 25명을 대상으로 4-H 클럽을 조직했다. 육지에서 닭, 토끼, 개량돼지를 들여와 사육하다가 무이자로 가축을 빌려주는 가축은행을 만들어 운영했다. 4-H 클럽은 이후 성이시돌 목장의 모태가 됐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후 손수 해외원조를 따내 자본을 축적하고, 양 등을 사들여 1961년엔 축산업 교육과 실습 등을 목적으로 성이시돌 목장(성이시돌 중앙실습목장)을 세웠다.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등지에서 종축과 함께 선진 축산기술을 꾸준히 도입해 목장을 불렸고, 축적된 기술은 전국으로 보급됐다.
목초를 가꿔 소와 양을 먹였다. 농민들에게 사료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1964년 사료공장도 가동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기술은 모자랐지만 도민들이 협동심과 성실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한국의 축산업을 선도할 정도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목장 사업을 기반으로 1천300여 명의 여성을 고용하는 한림수직도 1959년 설립했다. 1950년대 말 가난한 집의 한 소녀 신자가 돈을 벌러 부산에 갔다가 사고로 숨진 일을 겪은 뒤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림수직에서는 제주 여성들이 직조 기술을 배워 양털로 제품을 만들어냈다. 고품질의 다양한 제품이 생산돼 한때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밀려들 정도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한림수직은 값싼 중국산 양모제품에 밀려 2004년 결국 문을 닫았지만, 수십년 간 차별 없이 지역주민을 고용하는 정책을 고수하며 많은 여성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맥그린치 신부의 열정과 도민과 합심해 만들어낸 성과는 당시 정부도 움직이게 했다. 1973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이 이시돌 목장을 찾아 목장 구석구석을 살핀 뒤 농장의 숙원 과제였던 도로와 전기, 전화 설치를 지시했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토대로 이시돌 목장은 급격히 성장해 나갔다.
맥그린치 신부는 목장 건설 과정에서 1961년 4-H 회원들과 함께 이시도레하우스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1963년 목장의 사료공장, 1965년 협재성당 등이 테쉬폰 양식으로 지었다. 이후 테쉬폰 양식은 200여채 가량 보급돼 주택 등으로 쓰였다.
테쉬폰은 곡선 형태의 텐트 모양과 같이 합판을 말아 지붕과 벽체의 틀을 만들어 고정한 후 틀에 억새, 시멘트 등을 덧발라 만든 건축물을 지칭한다.
제주에만 20채 미만 남아있는 테쉬폰 건축물은 최근 관광객들의 방문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제주에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신협) 설립을 추진한 것도 맥그린치 신부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한림에 은행이 없어서 농민들이 계를 들었다가 돈을 떼이거나 높은 사채 이자에 허덕이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안정적으로 돈을 맡기거나 빌릴 수 있어야 농축산업도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1962년 제주도 최초이자 농촌 지역 1호, 전국에서도 7번째인 한림신협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다양한 사업으로 생긴 수익금으로는 병원·양로원·요양원·유치원·노인대학·청소년수련시설 등 사회복지시설을 설립, 운영하며 도민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왔다.
그 가운데 1970년 개원한 성이시돌 의원은 당시 도내 최고 수준의 인력과 시설을 갖추고 돈이 없는 도민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병원은 항상 적자였다.
수십년 동안 제주도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해왔던 맥그린치 신부는 2000년대에 들어 서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제주 사회가 돌봐야 할 '가난'의 형태 가운데 '죽음'에 주목했다. 그는 죽음을 앞둔 가난한 병자들이 사회적 무관심과 지원부족으로 비참한 임종을 겪게 되는 것을 일종의 차별로 여겼다. 이에 마지막 사업을 호스피스 병원으로 정하고 2002년 3월 성이시돌 병원을 호스피스 중심의 성이시돌 복지의원으로 재개원했다.
호스피스란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불필요한 연명 치료보다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보호를 중심으로 심리적 안정을 돕는 것을 말한다.
성이시돌 복지의원은 후원회원들의 도움과 이시돌농촌사업개발협회 지원으로 전액 무료로 운영되고 있다.
맥그린치 신부 본인 역시 삶의 마지막 거처로 성이시돌 복지의원을 택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1975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 국민훈장 모란장, 적십자상, 제주도문화상 등을 받았다. 2014년에는 한국에서 반세기 넘게 선교와 사회사업에 몸 바친 공을 인정받아 고국인 아일랜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64년간 제주도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도민들의 '자립'과 '사람다운 삶'을 도왔던 맥그린치 신부는 영원히 제주에 남는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이시돌 글라라 수녀원 묘지가 그의 마지막 주소지다.
※ 이 기사는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천주교 한림본당 50년사, 맥그린치 신부 평전인 '오병이어의 기적-제주한림이시돌 맥그린치 신부'(양영철 저)의 글과 수록 사진, 대통령기록관과 맥그린치 신부 장례위원회 제공 사진 등을 이용해 작성했습니다.
ji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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