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외주화'는 현재진행형…"다단계 하도급 금지가 근본 대안"
삼성중 "자체점검 연 3회로 강화, 작업장 안전관리 강화"
(거제=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나만 안 다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내가 조금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둘 다 안 다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당시 숨진 저희 팀의 막내가 원망스런 눈빛으로 꿈에 자주 나타납니다"
A(55) 씨는 작년 5월 1일 발생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사고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A 씨는 물량팀장으로 도장작업을 하던 중 '쿵'하는 굉음이 나고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업특성 상 조선소의 소음과 진동은 워낙 빈번한 일이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던 중 또다시 '쾅'하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려 퍼졌다.
순간 '큰 사고가 난 게 틀림없다'고 직감한 그는 동료들에게 "피해"라고 소리치며 작업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얼마나 뛰었을까.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차린 A 씨가 주변을 둘러보니 그제야 쓰러진 크레인 붐대(지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소리를 듣고 함께 대피하던 작업팀의 막내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A 씨는 "평소 나를 잘 따르던 막내였는데 사고 당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아직 시달리고 있다"며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팔에 감각이 없는데 괜찮아 보이느냐, 살려달라'던 다른 작업자의 얼굴도 자꾸만 떠오른다"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지금도 하늘이 보이는 곳에 있으면 외벽이나 주위에서 뭐가 떨어지거나 무너질까 두렵다"며 "'여기서 사고가 생기면 어디로 대피할까'라는 생각을 하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제대로 된 후속 조처 없어 '갑갑'
A 씨의 사례처럼 6명이 숨지고 25명이 다친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의 많은 피해자는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나 제대로 된 후속 조처가 이뤄지지 않아 이중고를 겪고 있다.
마산·창원·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에 따르면 삼성중공업 사고 이후 근로복지공단에 트라우마로 인한 산재 요양을 신청한 노동자는 모두 12명이다.
산추련은 지난해 9월 트라우마 실태조사를 해 고용노동부에 제출했으나 아직 이렇다 할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산추련 이은주 상임활동가는 "정부가 중대재해 트라우마 지원사업을 세우겠다고 하지만 그 출발점인 삼성중공업 사고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이 이 정도라면 제대로 된 정책을 마련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실태조사 당시 위험군으로 분류된 노동자 160여 명도 현재 사실상 방치 상태이다"고 비판했다.
이어 "지금도 하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안전조치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터로 내몰리고 있다"며 "그야말로 무법천지에서 노동자들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삼성중공업 하도급 노동자는 "삼성중공업 사고는 예견된 일이었고 달라진 게 없는 작업환경에서 또 누군가 쓰러져 나갈 것"이라며 "동료 중 '크레인에 다쳤는데 다시 그 크레인에 매달려 여전히 일하고 있다'며 불안감을 표출하는 이도 있다"고 한숨 쉬었다.
산업현장에서 삼성중공업 사고와 같이 '안전 사각지대'에 내몰린 이들은 대부분 하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 참여 조사위원회에 따르면 2007∼2017년 조선업 사고사망자는 총 324명이며 이들의 80%(258명)는 하청업체 노동자였다.
특히 삼성중공업의 경우 일이 험하고 위험해 기피직종인 도장, 보온 분야 비정규직 노동자만 1천850명에 달해 이들이 사고에 노출될 가능성이 정규직과 비교하면 더 커 '위험의 외주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삼성중공업 등 원청업체는 협력업체 안전보건관리 규정을 두고 있지만, 이는 서류상으로 존재할 뿐 실제 작업자들은 현장에서 안전보다 생산성을 더 우선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다단계 재하도급 전면 금지가 '위험의 외주화' 해법
원청업체는 '안전'을 강조하지만, 이는 구호에 그치기 일쑤고 실제로는 생산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삼성중공업의 경우 크레인 사고 뒤 노동자 9천500여 명에 대한 휴업수당 미지급액도 27억2천만원에 달했다.
이 때문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이 주축인 '산재사망대책마련 공동캠페인단'은 최근 '2017년 최악의 살인기업' 1위에 삼성중공업을 뽑기도 했다.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이김춘택 사무장은 "2, 3차 재하도급이 늘면서 생산과 안전의 불일치 현상이 늘고 있다"며 "조선업종에서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줄이기 위해선 다단계 재하도급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삼성중공업은 안전을 경영 제1원칙으로 크레인 사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웠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안전관리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크레인 충돌방지 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다양한 예방대책을 마련했다"며 "이밖에도 자체점검을 연 3회 수준으로 강화해 모든 생산 부서와 해외 법인을 대상으로 작업장 안전관리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휴업수당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사내 협력업체와 고용관계를 맺고 있다"며 "삼성중공업은 이미 사내 협력업체에 도급금액을 모두 지불했기에 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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