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부산 유엔기념공원 방문하는 86세 제임스 그룬디
(부산=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아흔을 바라보는 노병은 아직도 '현역'이었다.
1일 오전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한 6·25 전쟁 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86) 씨는 동료들의 묘역 앞에 거수경례를 했다.
"전역 후에도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이 떠올라 괴로웠지만, 여기에만 오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룬디 씨는 한국전쟁 중 영국군 '시신수습팀'(Recovery Unit)으로 1951년 2월부터 1953년 6월까지 복무했다.
총 대신 삽과 곡괭이를 들고 전장에서 숨져간 동료들의 주검을 되찾아오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총탄에 갈기갈기 찢긴 전우의 살점과 뼈를 수거하는 일은 죽음의 공포보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룬디 씨는 26개월간 묵묵히 해냈다.
영국군 시신수습팀은 치열한 전투 속에 시신을 수습하며 귀대하는 도중 수차례 북한군과 마주쳤지만, 북한군은 시신수습팀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 길을 막지 않았다는 게 그룬디 씨의 증언이다.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빈 그룬디 씨와 팀원들이 수습한 유해는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은 미군 다음으로 많은 1천177명이 전사했고 그중 855명이 유엔기념공원에 영면했다.
유엔기념공원에는 한국전쟁 기간 중 희생된 11개국 2천300명의 유엔군 전사자들이 안장돼 있는데 그 중 영국군 전사자가 가장 많다.
맨체스터 맨시티 축구단의 미드필더를 거쳐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은퇴한 그가 다시 부산을 찾은 것은 1988년이다.
당시 한국 정부 초청으로 영국군 참전용사 100여 명과 부산을 방문한 이후 매년 이어진 한국행은 올해로 30년이 됐다.
그룬디 씨는 이맘때면 부산 방문이 본인 인생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척추암 말기 진단을 받은 뒤 의사의 만류에도 진통제까지 맞으며 유엔기념공원에 먼저 묻힌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학생들에게 강연도 한다.
몇 년 전 수양손녀로 삼은 유엔기념공원 홍보과장 박은정(41·여) 씨를 만나는 것도 부산 방문의 이유 중 하나다.
그룬디 씨는 30년간 거의 매년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하고 영국 현지에서 한국전쟁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자신이 묻었던 전우들 옆에 영면하고 싶어 했다.
유엔기념공원 측 역시 그의 헌신에 보답하는 의미로 국제관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사후 안장을 허가했다.
한국과 부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그룬디 씨는 최근 영국 현지에서 방송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접했다며 "굉장히 긍정적인 시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앞으로 좀 더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이번 일이 그 물꼬를 트는 시작"이라며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했다.
그룬디 씨는 지난해 백내장 수술을 받고 시력이 회복된 이후 글쓰기와 한국전쟁 관련 책 읽기에 매진하며 학생 등을 대상으로 예정된 강연에 나설 생각에 들떠 있다.
오는 11일 영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2일 유엔평화기념관, 3일 부산외국어고 등에서 그룬디 씨의 강연이 열린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매년 부산에 올 계획"이라며 "나도 언젠가는 동료들이 잠든 부산에 영원히 잠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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