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시인 네 번째 시집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무당처럼 아픈 이들을 달래주고 한풀이를 해주는 듯한 시를 쓰는 김해자 시인이 새 시집 '해자네 점집'(걷는사람)을 내놨다.
시인은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데뷔한 이래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등 시집을 발표하며 독보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올해로 시력(詩歷) 20년을 맞아 내놓은 이번 시집 '해자네 점집'은 그동안 쌓은 내공의 총체를 담은 듯 깊고 원숙한 세계를 보여준다.
한 평론가는 "이 나라의 가난한 영혼이 고통을 받는 모든 곳에 김해자 시인의 시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번 시집에는 그런 시들이 가득하다.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사랑은 끝내지지 않는다', '여기가 광화문이다', '시 같은 거짓말과 허구가 필요했다' 등 네 부로 나눠 묶인 시 61편은 이름없는 이웃들의 낮은 읊조림을 들려주고 이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꼬집는다.
"밥 먹으러 오슈/전화받고 아랫집 갔더니/빗소리 장단 맞춰 톡닥톡닥 도마질 소리/도란도란 둘러앉은 밥상 앞에 달작지근 말소리/늙도 젊도 않은 호박이라 맛나네,/흰소리도 되작이며/겉만 푸르죽죽하지 맘은 파릇파릇한 봄똥이쥬,/맞장구도 한 잎 싸주며/밥맛 ?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중)
"낫 지나간 자리 풀 비린내가 진동한다/울고 있는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 아직/외상外傷은 언젠가 아물고 새 잎이 자랄 것이다//제초제 덮어쓴 풀들은 아우성조차 없다/언제 풀이었던가/내장까지 타버린 누런 몰골//달도 없는 밤,/그는 제초제 한 병을 입 안에 부어버렸다/녹은 것은 켜켜이 들어찬 어둠 속 내상內傷/내장된 상처는 빠른 속도로 이지러졌다//안이 다 녹아 없어지도록/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전문)
고통받는 이들을 돌아보는 시인의 마음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고통 속에서 말은 완성되지 않는다//산목숨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의 말 네 눈에 가득한/눈물이 아니라면 짐승의 살가죽에서 솟구치는 진땀이 아니라면/저 층층이 쌓인 책들과 이 많은 말들이 무슨 소용인가//불구가 아니면 불구에게 닿지 못하는/불구의 말, 떠듬떠듬 네게 기울어지던 말들이/더듬어보니 사랑이었구나" ('불구의 말' 중)
'삼례 나라슈퍼 삼인조' 사건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의 슬픈 사연을 담은 시 '모른다'와 이산가족 아픔을 다룬 '남녘 북녘', 80년대 군사정권 아래 고문 피해자들을 회고하는 '살려주세요', 촛불집회 현장을 노래한 '여기가 광화문이다' 같은 시들도 마음을 울린다.
추천사로 권민경 시인은 "김해자 시인은 모든 아픈 사람, 이웃의 자매이다. 그녀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한 위로를 글로 쓴다. 그것이 그녀가 믿으며 우리가 전해 듣는 신(神), 김해자 시의 정체다"라고 말했다.
김해자 시인은 이번 시집에 넣은 '시인의 말'로 "밥과 술 그리고 웃음까지 나눠 먹는 이웃들과 친구들이 이 시들 중 몇 편이라도 듣고 껄껄 웃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이 책은 도서출판 걷는사람 시인선 시리즈 첫 번째 작품으로 나왔다. 출판사 측은 "국내 시인선 시리즈 가운데 여성 시인을 1번으로 출간한 최초의 사례라는 데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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