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집중호우로 올림픽 알파인 경기장 토사유출 심각
피해주민 "예고된 인재, 장마철 대책 마련" 촉구…정부 "6월 중순까지 응급조치"
(정선=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화재보다 무서운 게 수재야. 다 쓸어가 버리잖아. 물보다 무서운 게 없다니까…"
30년 동안 가꾼 삶의 터전도, 조경수를 키우며 키운 노후의 꿈도 시간당 30㎜가 넘는 집중호우에 처참히 무너져내렸다.
태풍 루사·매미 이후 한 번도 흙물이 들어찬 적이 없었던 마당은 갯벌처럼 진흙탕으로 변했다.
그 위를 지난 발자국과 굴삭기의 선명한 바퀴 자국은 그날 사태를 짐작게 했다.
주민 김선중 씨는 토사가 흘러내려 엉망진창이 돼버린 뒷마당에 쪼그려 앉아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한 마디가 침묵을 깼다.
복구라 해도 면사무소에 사정해 받아온 굴삭기 한대를 이용해 임시방편으로 집 뒤편에 둑을 쌓고 물길을 돌리는 정도.
앞으로 얼마나 긴 작업을 혼자 쓸쓸히 이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달 17∼18일 집중호우로 마당이 흙탕물로 바다를 이룬 새벽에 아내 손을 붙들고 근처 리조트로 대피했던 일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그땐 진짜 폭포였어 폭포. 거짓말 안 하고 물이 10m 넘게 튀어 올라서 옆에 산을 다 까고 내려왔다니까. 3일 동안 장화를 신고 다닐 정도였다고."
그의 말따라 물이 10m나 튀어 올랐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김씨의 집 위 바로 위에 있는 정선 가리왕산을 올랐을 때 그 말이 허무맹랑한 거짓이 아니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나 된 열정'이 가득했던 2018 평창동계올림픽 알파인 경기장은 쑥대밭이었다.
올림픽이 치러졌던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새하얗던 설상은 거친 속살을 드러냈다.
경기장 진입도로 주변은 토사가 도로 폭 만큼이나 움푹 쓸려나갔다.
눈대중으로도 지름 4∼5m는 족했고, 쓸려나간 토사 무게는 짐작도 어려웠다.
배수로에는 아직도 당시 내린 빗물이 흘러넘칠 듯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빗물은 사람이 만든 길만을 따라 흐르지 않았다.
가리왕산은 경사면 곳곳에 물길을 만들고는 눈물을 쏟아내듯 물을 토해냈다.
땅은 매우 질척해 힘을 빼지 않고 걸었더니 흰색 운동화가 갈색으로 순식간에 변했다.
토사가 얼마나 깎였는지 나무뿌리는 생기를 잃은 채 힘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도블록은 길이가 10여m쯤 사라졌는데 대체 어디로 날아간 것인지 잔해는 보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배수로 일부는 쌓이고 쌓인 토사가 물길을 틀어막은 탓에 흙탕물이 길을 잃은 채 고여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쑥대밭이나 폐허 말고는 달리 설명할 표현이 떠오르질 않았다.
지난 23일 기자가 둘러본 곳은 경기장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정상부로 가는 길이 막힌 탓에 경기장 전체를 확인할 순 없었지만 비교적 완만한 아래가 이 정도라면 위는 얼마나 심각할지, 장마철이 다가오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지난 17∼18일 정선 알파인 경기장이 있는 가리왕산 일대에는 시간당 30㎜ 안팎의 비가 내렸다.
집중호우라지만 총 강수량은 100㎜에도 못 미쳤는데 배수관 월류와 매몰현상이 일어났고, 넘친 물과 토사가 경기장 아래 민가까지 흘러내렸다.
10만t을 담을 수 있는 빗물 저류조는 자연의 힘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김씨를 포함한 2가구 주민 6명은 인근 리조트로 대피했다.
같은 날 수해가 발생한 평창군 대관령면은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피해보상절차에 들어갔으나 가리왕산 지역은 뒷전이다.
산림청이 지난 3월 말 알파인 경기장 일원에 대해 국가안전대진단을 한 결과 여름철 우기 때 붕괴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로 '예고된 인재'였는데도 말이다.
1천926억원이나 쏟아 부어 만든 알파인 경기장은 이제는 산 아래 민가와 리조트를 위협하는 시한폭탄이 됐다.
김씨는 "피해보상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피해방지대책 마련"이라며 "장마가 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대책을 세워줬으면 한다"고 바랐다.
마침 이날 정부는 알파인 경기장 일대 현장점검을 했다.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을 비롯해 행안부, 산림청, 강원도, 정선군 관계자 등은 집중호우 응급 조치사항과 가리왕산 산사태 응급 재해 방지시설 보강 추진현황을 살폈다.
김 수석은 "국민이 염려하듯 조금 걱정스러운 대목들이 보였다"며 "경기장 안정화를 위한 관계기관 TF를 구성해서 운영하고 적어도 6월 중순 전에는 긴박한 응급조치는 시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했다.
conany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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