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北 핵실험장 폐기 디딤돌로 북미 협상 동력 높여야
(서울=연합뉴스) 북한이 비핵화 이행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과거 6차례 핵실험이 실시됐던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24일 예고했던 대로 폐기했고 5개국 언론을 통해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특히 어떤 보상을 전제하지 않고 선제적으로 핵실험장을 없앤 것은 비핵화 공언의 진정성과 연결지어 높이 평가할 일이다. 2008년 8월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가 9·19 공동성명 합의에 따라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호응 조치로 이뤄졌던 것과는 대비된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북핵 개발의 상징적 장소이기 때문에 폐기 조치의 의미는 매우 무겁다. 일각에서는 갱도가 이미 무너져 불능상태인 핵실험장을 '쇼'에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하지만, 풍계리는 언제든 핵실험이 가능한 상태라는 게 정보 당국과 전문가들의 대체적 진단이다.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38 노스는 6차 핵실험 이후 북쪽 갱도는 버려졌지만, 서쪽과 남쪽 갱도는 핵실험이 가능한 '완전 가동 준비가 갖춰진' 상태라고 평가했던 만큼, 자발적인 핵실험장 폐기 조치에는 북한이 노선 전환을 실천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핵실험장 폐기 선언은 지난달 노동당이 핵·경제 병진 노선을 사회주의 경제 건설 총력 집중 노선으로 전환한다는 선언과 함께 공표됐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핵실험장 폐기 현장에 전문가가 초청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지만 비핵화 합의 후 필연적인 사찰·검증 과정에서 국제 모니터링팀의 현장 방문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 핵실험장이 폭파·폐기되더라도 핵 물질을 확인하는 사후 검증은 가능하다.
북한의 핵실험장 폐기는 비핵화 로드맵을 놓고 북미 간에 수 싸움과 언쟁이 전개되고 북미 정상회담 재고려 또는 연기라는 얘기까지 나오는 길목에서 회담 성사에 다시 동력을 싣는 청신호다. 말보다 행동의 무게가 중하기 때문이다.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쟁점은 비핵화와 보상의 단계와 시간표에 대한 합의이다. 서로 이익의 균형을 취하는 방식으로 여하히 합의하느냐가 관건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2일 북한이 반발하는 '선 핵폐기·후 보상' 해법에서 한발 물러나 최단기간 내 신속하고 압축적인 비핵화를 추진하되 단계적 이행 방식을 일정하게 수용하는 '유연한 일괄타결' 해법을 제시한 만큼, 북미는 이견을 좁히는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 주말 싱가포르 실무접촉도 성실하게 임해야 하지만, 필요하다면 협상 사령탑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다시 만나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를 진짜 결정했는지, 트럼프 대통령이 체제보장을 진짜 담보하는 것인지를 다시 확인해서라도 고위급 채널에서 큰 틀의 합의안을 도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북미는 협상 상대 국가로서 서로를 배려하는 신중한 자세가 긴요하다. 반세기 넘도록 적성국으로서 신뢰 기반이 약한 상대이기에 자존감을 훼손하는 발언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판을 악화시킬 수 있다. 24일에도 북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의 '리비아 전철' 발언을 비난하며 북미 정상회담 재고려 언급을 했다. 경고성 발언으로 보이지만, 미 고위층도 협상 쟁점과는 무관한 자극적 언행은 자제해야 한다. 유리그릇 다루듯 세심하게 상황 관리를 해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선제 핵실험장 폐기 조치가 불신을 해소해가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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