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개인전 '상(象)을 찾아서' 개막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화가 강요배(66)는 지난해 상강(霜降) 무렵 석양을 그리자 마음먹었다. 상강은 볕이 줄고 서리가 내리면서 스산함이 감돌기 시작하는 때다.
"처음에는 석양이 너무 신파조로 나오는 거라. 이거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러지 싶었지." 작가는 불타오르는 해 대신, 석양이 스민 구름에만 캔버스를 내어주는 것으로 감정을 가라앉혔다.
강요배 개인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첫머리에 놓인 '상강'은 차분한 얼굴로 관객 마음을 뒤흔든다. 회청색 하늘을,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진 주황빛 구름 조각들이 부유한다. 적과 청은 원색적으로 대립하기보다는 서로 조심스레 스민다. 작가는 빗자루를 붓처럼 휘둘러 이 오묘한 화면을 완성했다.
'상강'을 비롯해 30여 점의 이번 전시 출품작은 풍경화이면서 풍경화가 아니다. 한때 민중미술가로 이름을 날렸고 이제는 '제주 화가'로 더 유명한 작가는 자연풍경을 본 다음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 심상을 더듬어 캔버스에 펼쳐놓았다.
"어떠한 그림이 그림다운 그림인가를 많이 고민했어요. 표피적인 이미지가 아닌, 좀 더 압축된 것이 진정한 상(象)이 아닐까요. 외부 대상에 단순히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기운이나 느낌, 흐름을 나중에 작업실에 와서 끄집어 내보내는 것이죠."
학고재 개인전 제목을 '상(象)을 찾아서'로 지은 이유다. 작가는 평소 사진 촬영이나 스케치하는 일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작가는 25일 간담회에서 "대부분 사진에 의존해 작업하기 쉬운데, 그것은 표피에 말려드는 것"이라면서 "그럴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따끔히 지적했다.
폭이 5m를 넘는 대작 '보라 보라 보라'(2017)는 격랑의 바다를 전시장에 풀어놓았다. 파도가 바위를 치고 세차게 올라가는 풍경을 담은 '치솟음'(2017)을 바라보던 작가는 "가슴이 답답해서 무엇인가를 그려 뚫어볼까 싶을 때 그렸다"고 소개했다. '우레비'(2017)는 천둥과 바람과 비가 퍼붓는 어느 날 밤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이다.
여러 번 구긴 종이와 말린 칡뿌리, 빗자루 등을 통해 만들어낸 성기면서도 투박한 질감이 그림의 멋을 더한다.
강요배가 자연풍경에 담아낸 내면 심상은 추상의 세계와도 연결된다. 작가는 추상화(abstract painting)의 '앱스트랙트' 뜻을 언급하면서 "진정한 추상은 애매하게 그리는 것, 기하학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을 찾아서'는 6월 17일까지 열린다. 닷새 뒤에는 2부 격인 '메멘토, 동백'이 개막한다. 4월 제주의 아픔을 간직한 '동백꽃 지다'를 비롯해 1989년부터 지난해까지 강요배 역사화를 한 자리에 모으는 전에 없던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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