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이후 첫 소설집…"여성들 삶 더 많이 드러나고 기록됐으면"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아홉 살 어린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여 명의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목소리에서 이 소설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상기된 얼굴, 자꾸만 끊기던 목소리, 가득 고였지만 끝내 흘러내리지 않던 눈물을 잊지 않겠습니다."
소설가 조남주(40)는 새 소설집 '그녀 이름은'(다산책방)을 펴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쓴 작가가 다시 전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그 자체다. 그가 60여 명의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한 이야기는 2016년 12월부터 1년간 경향신문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제목의 르포 기사로 연재됐다. 작가는 이 이야기들을 28편의 짧은 소설들로 재구성해 이번에 책으로 냈다.
"인상적인 것은 많은 여성들이 '특별히 해줄 말이 없는데', '내가 겪은 일은 별일도 아닌데'라며 덤덤히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흔하게 일어나지만 분명 별일이었고 때로는 특별한 용기와 각오, 투쟁이 필요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체로 의미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특별하지 않고 별일도 아닌 여성들의 삶이 더 많이 드러나고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쓰는 과정보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듣는 과정이 더 즐겁고 아팠다는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에서처럼 특유의 건조한 화법으로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체는 담담하지만, 그 문장들의 행간에는 분명 분노가 서려 있다. 이 책에 나온 이야기들은 여성들에게 너무나 빈번히 일어나는 일들이어서 여성이라면 함께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두 번째 사람'은 최근 '미투' 국면에서 우리 사회에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20대 후반으로 한 공기업의 지방 지사에서 일하는 '소진'은 사수인 유부남 과장에게 원하지 않는 신체접촉과 성적인 농담,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는 끈질긴 추근거림을 받는다.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해 팀장에게 이메일로 상황을 알리지만, 팀장은 과장을 징계하지 않고 소진을 다른 팀으로 옮겨주겠다고 한다. 이런 옳지 않은 처사에 계속해서 징계를 요구하자, 팀장과 과장의 괴롭힘이 시작된다. 심지어 소진이 전 직장에서 유부남과 사귀다 가정마저 깨놓고, 회사에 알려지자 두 달가량 무단결근한 뒤 노동부 진정으로 급여를 받아 챙겼다는 소문까지 퍼뜨린다. 이번에도 소진이 의도적으로 과장에게 접근한 후 무마 조건으로 승진과 서울 발령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사내 따돌림에 억울한 명예훼손까지 이어지자 소진은 공황장애까지 앓게 된다.
그녀는 이런 회사를 상대로 싸우기 위해 포털사이트 게시판과 자신의 SNS에 사건 경과부터 회사의 조치까지 모두 폭로한다. 하지만 기사화된 뒤 신상털기가 시작되고 인터뷰 기사마다 심각한 악플이 달린다. 회사는 그 와중에도 합의를 종용하고 과장은 고소를 준비 중이라고 전한다. 그녀는 머리를 빗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음식을 먹기만 하면 토해서 수액과 영양제로 버티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싸움을 그만두지는 못한다.
"같은 과장에게 성희롱 당하다 퇴사했다는 직원은 소진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때 자신이 조용히 덮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소진도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책했다. 물론 소진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덮고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20쪽)
이 책에는 이런 성폭력뿐 아니라 부조리한 노동 환경 속에 위태롭게 놓인 2030 여성들, 결혼이라는 제도 중심과 언저리에서 고민하는 여성들, 제 이름도 잊은 채 가사·양육 노동이나 직장 노동, 때론 둘 다를 오랜 시간 떠맡아온 중년 이상의 여성들 등 이 땅의 여성들 대부분이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차별과 폭력이 기록돼 있다.
"경찰에서는 술 마시고 실수한 거라고, 특별히 나를 노린 것도 아니고 이 방에 여자가 사는 것도 몰랐다고, 자기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고 그랬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만취한 사람이 좁고 위태로운 가스관을 딛고 올라와서 그렇게 치밀한 손놀림으로 창문을 연다는 게 가능한가. 나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는데 경찰은 그 말을 믿는 것 같더라." (47쪽, '어린 여자 혼자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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