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에도 미친 지방선거 여파…둔촌주공 고양이 어디로

입력 2018-05-31 15:23  

길고양이에도 미친 지방선거 여파…둔촌주공 고양이 어디로
홍천·진천으로 옮긴다더니…쏟아지는 공약 속 이주계획 표류
전문가들 "표 위한 동물복지 공약 우려…실현 가능성 따져야"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지방선거와 고양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양이는 지방선거 옆에 놓기에는 어색한 단어였다.
그러나 동물복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문재인 대통령의 반려묘 찡찡이와 반려견 마루·토리가 관심을 받으며 작은 생명체들도 6·13 지방선거의 여파를 겪고 있다.
특히 재건축을 위해 주민들이 모두 떠난 아파트단지에 덩그러니 남은 길고양이들이 그렇다.

◇ 아파트 철거 전까지 150여 마리 이주 필요
지난 23일 찾은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에는 단지 전체를 둘러싸는 펜스가 올라가고 있었다.
단일 규모로 국내 최대 재건축 단지인 둔촌주공은 164개동 5천930세대를 철거하고 1만1천106세대로 재건축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주민들은 올해 1월 중순까지 모두 떠났다. 지금은 아파트 건물 높이를 훌쩍 넘게 큰 나무 일부를 골라내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다.
곳곳이 파헤쳐진 단지 안에 들어서자 이내 고양이 한 마리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은 떠났지만 고양이는 떠나지 못했다. "어머, 소희가 여기 있었네. 저 고양이는 원더걸스 '소희'를 닮지 않았나요?"
둔촌주공에는 단지 안에 사는 길고양이 보호와 안전한 이주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 '둔촌냥이'가 있다. 작년부터 1년 가까이 길고양이를 돌보고, 개체 수를 파악하는 작업을 지속해 이제 고양이 얼굴만 봐도 붙여준 이름이 튀어나올 정도다.
이들은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자리를 단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서서히 옮겨 아파트 건물 철거 전에 고양이 150∼170마리를 빼내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주 비용은 활동 취지에 공감하는 시민들의 모금액으로 충당할 예정이었다.
길고양이 이주 계획에 제동이 걸린 것은 작년 말부터다.
후원 명단에 여당 국회의원 이름을 줄줄이 내건 A단체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사무총장은 더불어민주당의 동물복지정책 특보단장이라고 했다.
강원도 홍천군 일대 3만8천㎡ 땅에 '고양이 마을'을 만들어 둔촌주공 길고양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에 단지 안에서 고양이를 돌봐온 '캣맘'들은 환호했다.
A단체는 지난 3월 말엔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어 둔촌주공 고양이 이주 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사이 이주 장소는 충북 진천으로 바뀌었다.





이주 계획이 확정되길 기다리는 사이 고양이들을 단지 바깥으로 빼내는 일 역시 미뤄졌다.
둔촌냥이 활동가 정미진(36) 씨는 "국회사무처 소관 단체라고 하니 이주 예산, 공간을 확보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믿는 분들이 많았다"며 "그러나 고양이를 어떻게 이주하고 돌볼 것인지, '고양이 마을'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비용은 어디에서 조달하는지 등 구체적인 방안을 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까지도 전혀 내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아파트 철거 시점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주에 문제가 생기면 동물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고 우려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A단체는 국회의원 재보선 후보, 시장 후보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고 동물정책 공약을 자문하며 보폭을 넓혀갔다. 유기동물 마을·고양이 마을 공약이 성남시에서도, 안양시에서도 나왔다.
사라지는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하는 작업을 해온 이인규(36) 씨는 "곳곳에서 동북복지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현실은 위기"라며 "표를 위해 표면적으로만 동물 공약을 발표하는 것은 동물을 생각하는 유권자들의 절박한 마음을 이용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A단체 사무총장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둔촌주공 길고양이의 진천 이주가 준비는 돼 있는데, 옮기는 데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길고양이 이주 계획과 방안을 여러 차례 물었으나 "조만간 보도자료가 나오면 그것을 참고하라"고만 답했다.





◇ "입양센터 설립 확대는 긍정적…신중한 동물복지 공약해야"
반려동물 의료비 지원, 입양센터 확충 등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례없이 쏟아져 나오는 동물복지 공약에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재민 강동구 동물복지팀장은 "지방선거 후보자들이 관광 명소가 된 일본 고양이 마을, 대만 고양이 마을을 본떠 공약을 내놓는 경우를 봤다"며 "주변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고양이를 옮겨 마을을 만들 경우 타 개체를 해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팀장은 "각 후보자가 동물복지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정립한 뒤 공약을 내놓는 게 바람직하다"며 "반려동물 진료비 지원 공약의 경우 지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채일택 동물자유연대 정책팀장은 "지방선거 이후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 지원, 입양센터 설립 등이 확대된다면 긍정적"이라며 "그러나 표에 급급해 일단 내세웠다가 제대로 지키지 않은 공약은 유권자들의 실망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채 팀장은 "지역 사정을 고려해 동물복지를 어떻게 향상할지 고민해 달라"고 당부했다.
지난 몇 달간 혼란을 겪은 둔촌주공 활동가들도 이제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다음 달부터 고양이를 단지 바깥으로 빼내는 작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보호가 필요한 고양이가 잠시 지낼 계류장도 마련했다. 둔촌주공에서 자라던 나무를 이식해 놓은 공간에 머물 수 있도록 밥자리·잠자리도 준비하기로 했다.
새 아파트 건물을 다 지으면 나무 일부는 다시 아파트단지 안으로 돌아온다. 고양이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길 바라는 이들이 오늘도 인기척 뜸한 둔촌주공 단지 안을 오가고 있다.
chopar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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