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출발점…사법행정권 남용·재판독립 침해 정황
양승태 사법부, '상고법원' 도입 위해 쟁점판결로 靑과 거래 시도
(서울=연합뉴스) 송진원 기자 = 김명수 대법원장이 31일 최근 사법부에 불거진 '재판 거래' 파문과 관련해 국민 앞에 사과했다. 지난 25일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3차 조사 결과가 공개된 이후 6일 만이다.
사법 불신 기류가 급속도로 확산하자 사법부 수장으로서 사태 수습을 위해 직접 대국민 담화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법원 안팎의 관측이다.
'재판 거래' 파문의 시작은 지난해 2월 법원행정처가 특정 성향의 판사들을 감시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원 내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학회의 활동에 법원행정처가 부당 개입을 했다는 의혹 제기에서 비롯됐다.
이 사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성한 진상조사위원회가 '사실무근'이라고 발표하면서 지난해 4월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관련 의혹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결국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11월 13일 추가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재조사에 들어갔다.
올 1월까지 진행된 2차 조사에서는 법원행정처가 법관 동향을 수집한 정황이나 청와대와 특정 재판을 두고 연락을 주고받은 정황이 담긴 문건이 다수 발견됐다.
그러나 행정처 컴퓨터 속 상당수 문건은 여전히 암호가 걸려있어 파일을 열어보지 못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김 대법원장은 특별조사단을 구성해 3차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대법원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부의 협조를 얻으려고 일선 재판을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조사단이 확보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방안',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 전략' 등 문건에는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박근혜 정부가 관심 두는 판결을 조사하고, 판결 방향까지 직접 연구한 정황이 담겼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성완종 리스트 사건 재판 영향분석 및 대응방향',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원 행정소송 예상 및 파장 분석', '통진당 사건 전합(전원합의체) 회부에 관한 의견' 등 문건이 대표적이다.
그간 사법부가 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협조했다고 자평하는 문건들도 여럿 발견됐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고려한 판결(이석기·원세훈·김기종 사건 등)', '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KTX 승무원, 정리해고, 철도노조 파업 사건 등)', '교육 개혁에 초석이 될 수 있는 판결(전교도 시국선언 사건 등)' 등이 문건에 열거됐다.
행정처는 일선 법원의 판결을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법부에서 작성한 문건이라고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표현도 발견됐다.
청와대가 상고법원 반대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경우 "BH 국정운영 기조를 고려하지 않는 독립적·독자적 사법권 행사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는 내용도 행정처 문건에 버젓이 실렸다.
조사단은 이 같은 문건 내용이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사례라고 지적했고, 법원 내에서도 판사들의 비판 목소리가 거세게 쏟아져 나왔다.
문건 속에 청와대와 협상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고 거론된 재판 당사자들은 판결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크게 반발했다.
해고무효 소송에서 최종 패소한 KTX 해고 승무원들은 행정처 문건 속에 'KTX 승무원 재판'이 거론된 것으로 나타나자 대법원 대법정을 기습 점거해 항의 시위를 벌였고, 여러 시민단체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관련자들을 줄줄이 검찰에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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