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한국인 유골 발굴로 인연…정부 발굴 이끌어내고 안치장소 모색
"유골 봉환 안된 책임 일본에 있지만, 한국 정부도 '지금은 힘들다' 말만"
(이키<일본 나가사키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처음에는 민단 등 관련 단체에 부탁하면 유골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유골이 아직도 일본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고향에 못간 채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네요."
일본 정토진종의 승려이자 고교 교사였던 일본인 마사키 미네오(正木峯夫·72) 씨는 동료인 일본 시민사회의 활동가들로부터 "인생의 절반이 유골이다", "유골에 청춘을 바쳤다"는 '칭찬'을 듣곤 한다.
'과장된 말'이라며 고개를 가로젓지만, 마사키 씨는 강제 징용 등으로 일본에 왔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한국(조선)인들의 유골을 직접 발굴하고, 정부에 발굴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이렇게 수습한 유골의 안식처를 찾고 한국 봉환을 꾀하는데 삶의 상당 부분을 바쳤다.
그는 지난달 31일 나가사키(長崎)현 이키(壹岐)섬의 사찰 덴토쿠지(天德寺)에 안치된 강제징용자 등 한국인 유골을 처음 발굴한 일본 시민들 중 한명이다.
20대 후반 젊은 고교(사회과) 교사였던 그는 1974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광복 직후 귀국선을 탔다가 난파당해 이키섬에 떠내려온 한국인의 유골을 발굴하는 시민활동가 후카가와 무네도시(深川宗俊·사망) 씨의 얘기를 전해 듣고 그를 돕기로 했다.
그가 참여한 시민 그룹은 1976년 한국인 유골 86위를 수습했고, 일본 정부를 압박해 인근 쓰시마(대마도·對馬島)에서 유골 45위를 발굴하게 하는 성과를 이뤄 냈다.
이들 유골의 한국 반환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자 마사키 씨는 모두 131위인 유골을 모실 절을 찾아다녔다. 유골들은 모두 네 곳의 절을 전전했고 안치할 절을 찾지 못하자 마사키 씨는 한동안 자신의 집에 이 유골들을 모시기도 했다.
결국 2003년부터 사이타마(埼玉)현의 사찰 곤조인(金乘院)에 모셔졌던 이 유골들은 곤조인측이 계속 유골을 모시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면서 지난달 중순 이후 한달 반 가량 창고나 다름없는 일본 정부 후생노동성의 시설에 있다.
결국 마사키 씨를 비롯한 일본 시민 활동가들과 한국 시민단체들이 나섰고, 덴토쿠지에 안치됐다.
유골이 돌고 도는 사이 20대였던 마사키 씨는 70대 노인이 됐고, 유골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마사키 씨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유골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가장 큰 책임은 일본에 있지만, 한국 정부도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유골을 한국에 봉환하라며 맡겼지만 일본 정부는 별다른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유골을 한국에 보내지 않았고 이런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며 "한국 정부도 '지금은 (봉환이) 힘들다', '지금은 (유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계속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유골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선 안되는 것이지만, 그동안 항상 정치적으로 이용됐다"며 "국가가 관계되면서 정치가 얽혔고 상황이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마사키 씨는 "처음 유골 발굴을 시작할 때 일본에 끌려온 사람들을 일본인인 우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알면서도 발굴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며 "일본 정부가 여전히 모른 척을 하고 있지만, (유골이) 일본에 있는 한 일본인들이 정중하게 모셔야 한다"고 강조했다.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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