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스바움이 쓴 '분노와 용서' 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대표팀의 '왕따 주행' 논란 소식을 접한 사람 대부분이 드러낸 감정은 '분노'였다.
온라인 뉴스에는 논란 당사자로 지목된 사람을 공격하는 댓글이 잇따라 달렸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엄정한 대응과 처벌을 요구하는 글로 들끓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혹은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이독제독'(以毒制毒)은 악에 대처하는 전통적 방식이다.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마음가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두루 확인된다.
이에 대해 세계적으로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여성학자인 마사 C. 누스바움 미국 시카고대 철학부 교수는 묻는다. 과연 분노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분노는 미래 지향적 행동인가.
누스바움 교수가 2014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진행한 '존 로크 강좌' 강의록을 바탕으로 펴낸 신간 '분노와 용서'는 간디의 말을 인용해 이 질문에 단호하게 답한다. 눈에는 눈을 고집하면 온 세상의 눈이 멀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가족과 같은 친밀한 관계, 직장 동료나 상사와 맺는 '중간 영역', 정치적 영역이라는 세 가지 영역에서 분노를 살핀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분노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차라리 분노를 유발하는 원인과 거리를 두거나 냉정하게 법적 대응을 모색하는 편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분노가 일어나게 된 계기의 가치를 존중하는 한 적절한 감정이 될 수 있지만, 지위에 집착하고 피해를 갚아주겠다는 소망을 품으면 문제가 된다"며 "분노가 던지는 미끼를 물고 공상적 응징으로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행태는 지위에 기반을 둔 분노다. 이러한 분노는 상대를 비천하고 저열한 존재로 표상하게 하고 혐오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각종 혐오는 결국 '우리는 너희보다 낫다'는 위험하고 그릇된 생각의 발로다.
분노에 대해 비판적인 저자는 분노의 선한 대안이라는 용서도 탐구한다. 그는 용서를 조건부 용서, 무조건적 용서, 무조건적 사랑으로 구분한 뒤 조건부 용서는 부당행위를 당한 사람이 잘못된 사람의 치욕을 기뻐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 용서 또한 용서하는 주체가 도덕적 우월감을 풍긴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사회가 부정하고 타락해 법적 대응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피해 사실을 공인하고 다시는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높이 평가한다. 흑인을 괴롭히는 백인이 고통받길 바라거나 백인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인종 차별이라는 체제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분노를 내려놓는 건 소심한 반응이 아닙니다. 하나의 과잉에 또 다른 과잉을 더한다고 해서 어떻게 사태가 나아지겠습니까. 가해자가 고통을 겪더라도 그 문제는 순전히 사회적 제도가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뤄야 합니다."
뿌리와이파리. 강동혁 옮김. 584쪽. 2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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