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에 비친 한국사회의 얼굴

입력 2018-06-11 07:02  

말과 글에 비친 한국사회의 얼굴
허철구 교수의 에세이 '국어에 답이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요즘 도심 어디든 넘쳐나는 카페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지나친 공손함 때문일까 왠지 어색하다.
굳이 문법적으로 따지자면 사람을 높일 때 쓰는 '-시-'라는 선어말어미를 사물에다 쓴 탓이다. '만 원이세요'나 '주스는 없으세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실 '커피가 뜨겁지 않으세요?'처럼 '-시-'를 사물 주어에 아예 못 쓰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물을 높인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고 뚜렷하면 눈에 띄게 어색해진다.
국립국어원 연구원으로 우리말의 실태를 조사한 허철구 창원대 국문과 교수는, 신간 '국어에 답이 있다'(알투스 펴냄)에서 최근 한국인의 언어생활을 분석하며 경어 표현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법적으로 맞고 틀리는지를 떠나 지나친 경어 표현이 많다는 것이다.



'-분'은 친구분, 동생분, 남편분, 독자분 등과 같이 사람을 높이는 접미사인데, '손님분', '어머님분'처럼 이미 '님'이 붙은 말이나 '팬분', '학생분'처럼 존칭어가 아닌 말에도 붙여 쓴다. 가끔 듣게 되는 '사장님실' 같은 말도 거북하다.
왜 그럴까. 갈수록 사회는 각박해진다는데 언어생활은 예의 바르게 바뀌고 있는 걸까.
책은 경쟁이 치열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상품 광고나 기업의 홍보 문구처럼 일상의 언어에서도 경쟁하듯 과장한 표현이 넘쳐난다고 지적한다.
늘어난 경어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존중에서 비롯된 진정 어린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객을 대하는 종업원의 지나친 경어에선 어떡하든 고객을 붙잡아 매매를 성사시키려는 치열한 상술이나, 고객과 종업원을 수직적인 관계로만 바라보게 하는 우리 세태를 읽을 수 있다.
책은 '맘충'(육아를 이유로 주변에 피해를 주는 젊은 엄마), '급식충'(급식을 먹는 중고생) , '틀딱충'(틀니를 한 노인), '한남충'(한국 남자) 같은 혐오 발언 역시 경쟁에 내몰린 우리 사회 현실을 대변한다고 분석한다.
여성과 남성이, 노년 세대와 젊은 세대가 서로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경쟁 상대로만 인식하는 결과라는 것이다. 공격적인 혐오 발언 이면에는 어쩌면 경쟁에서 낙오하는 것이 두려운 자신을 지키려는 심리가 깔렸을 수도 있다.
책은 '스몸비', '덕후' 등 요즘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는 신조어들에서도 우리 사회의 단상을 읽어낸다.
스몸비는 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로 걸어가면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덕후는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마니아를 지칭하는 일본어 '오타쿠(御宅)'가 우리말에 들어와 변형된 것이다.
"한층 전문화되어 가면서도, 한없이 폐쇄화되고 개인화되어 가는 사회의 모습을 이 신조어들에서 볼 수 있다. 더욱이 그 이면에는 젊은이들의 우울한 현실마저 엿보인다. '스마트'와 '좀비', 이 기묘하고도 모순적인 결합이 능력은 있으나 현실의 벽에 좌절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고뇌를 상징하는 듯하다."(77쪽)
다른 한편으로 언어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섬세하고 배려심이 가득하며,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일례로 그는 '비장애인'이라는 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언어에서 구별 표지는 통상 사회적으로 소수이거나 예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쪽에 붙이기 마련이다. 이때 언어적 구별에는 사회적 차별이 내포돼 있다.
'여-'라는 구별 표지가 붙은 여교사, 여의사, 여배우, 여주인공 같은 말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비장애인에서는 '비-'라는 구별 표지의 용법이 역전돼 있다. 관점의 중심이 오히려 차별받는 쪽에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저자는 비장애인에는 "소수가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지향하는 가치관"이 담겨 있어 말의 가치가 크다고 평가한다.
책은 합리적인 언어생활을 위한 언어관을 제시한다.
올바른 언어생활을 위해 국가에서 정한 표준어 규정과 한글 맞춤법을 지킬 것을 권장하면서도, 이들 규범이 완벽한 것도 철칙도 아니라는 점을 부각한다.
표준어와 맞춤법은 언어생활에 편리함을 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언어생활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달라진다는 것이다.
언어생활을 표준어 중심으로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각에서도 벗어나고자 한다.
"처음 표준어를 만들 때는 이런 말(방언)은 모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잘 써서 보존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표준어는 공식적으로 필요할 때만 쓰면 되는 말이다. 즉 교실에서는 '옜다'라고 하고, 교실 밖에서는 '아나'라고 하는 이중적인 언어생활을 지향하는 것이다."(238쪽)
표준어는 보수적인 속성 때문에 쉴 새 없이 변하는 언어생활과 괴리한다. 하지만 언어의 근본은 대중의 말이기 때문에 표준어 규범은 이를 부지런히 쫓아가야 한다.
'짜장면'과 '먹거리'는 2011년 표준어로 인정받았으며, '이쁘다', '찰지다'는 2015년 표준어로 등재됐다. '김밥'은 2016년 [김:빱]이 표준 발음이 됐다.
저자는 특히 대중의 글쓰기가 보편화한 SNS 시대를 맞아 표준어 규범은 더욱더 유연해지고 대중의 말과 친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언어는 대중의 것이다. 우리말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대중의 생각과 참여는 중요하다. 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쏟을수록 국어는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392쪽)
394쪽. 1만6천원.
abullapi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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