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 '바실리 페트렌코와 제임스 에네스' 공연 리뷰
(서울=연합뉴스) 최은규 객원기자 = 그가 지휘봉을 들자 콘서트홀은 어느새 눈 덮인 러시아 대평원이 된 듯 싸늘해졌다. 평원을 감도는 차가운 공기처럼 맑고 투명한 현의 음색, 달콤 쌉싸름한 클라리넷 솔로, 칼바람처럼 날카로운 금관의 울림. 그것은 늘 듣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의 선율이 아니었다.
종종 식상하게 느껴지곤 했던 그 멜로디가 온몸의 감각과 감정을 일깨웠다. 이토록 구체적이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이 있는가. 새삼 음악이란 예술이 단지 귀로 듣고 기교를 즐기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감각과 감정, 상상력을 일깨우는 위대한 예술임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지난 14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 음악회에서 지휘봉을 잡은 러시아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는 러시아 음악이 얼마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인지 새삼 깨닫게 한 비범한 지휘로 한국 음악팬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연주시간 한 시간에 육박하는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곡으로 꼽히며 지휘자에 따라서는 지루함을 덜기 위해 악보 일부분을 삭제한 채 연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페트렌코와 서울시향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이 연주된 한 시간은 음악이라는 마법세계에 빠져들어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페트렌코가 지휘봉을 흔들자 그동안 이 교향곡에서 지나치곤 했던 세부의 아름다움이 낱낱이 드러났고, 악보 속 선율이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였다.
교향곡 연주가 끝나자마자 관객들의 열띤 환호와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 것은 물론이고, 음악회가 끝난 후에도 연주회 감흥을 나누려는 음악애호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음악회 후기를 공유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실리 페트렌코는 지휘자로서는 젊은 나이인 40대 초반이지만 그의 지휘는 매우 노련했으며 음악작품에 대한 통찰력은 경이로웠다. 우선 지휘봉을 다루는 그의 놀라운 기술만 보아도 대단히 감탄스러웠다. 그는 100명 가까이 되는 오케스트라 단원을 자기 방식대로 리드라며 자유자재로 원하는 템포를 구현해낼 뿐 아니라, 적절한 왼손 동작으로 악보에 나타난 세부적인 지시들을 정확하게 단원들에게 전달했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 2악장의 경우, 빠른 '알레그로 몰토(Allegro molto, 매우 빠르게)' 부분에서 정확하고 각진 지휘로 리듬 활력을 끌어내더니 '모데라토(Moderato, 보통 빠르기로)' 부분으로 바뀌자 그의 손은 마법처럼 부드러운 표정을 만들어내며 현악의 비단결 같은 음색을 뽑아냈다.
그 음악은 '매우 노래하듯이(molto cantabile)'의 표현 지시어를 완벽하게 소리로 재현해낸 것이었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을 통해 노래와 춤, 행진곡 등 모든 유형의 음악 양식을 자유자재로 선보인 페트렌코 지휘 덕분에 청중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음악을 감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음악회 전반부는 바이올리니스트 제임스 에네스의 빼어난 연주가 돋보인 무대였다. 그가 이번 공연에서 선택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국내외 콘서트 무대에서 지나칠 정도로 자주 연주되는 유명 곡이지만, 에네스의 기품 있고 편안한 연주와 작품에 대한 가식 없는 접근은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매혹적이고 감각적인 음색으로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많지만, 이토록 균형 잡힌 톤과 노래하듯 서정적인 연주로 바이올린의 매력을 전달해내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드물다.
에네스는 음색을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는 운지법(악기 연주 시 손가락을 사용하는 법)을 세심하게 구사하며 차이콥스키 선율을 좀 더 편안하고 부드럽게 표현해냈다. 힘차면서도 온화한 에네스의 바이올린 톤은 전설적인 거장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힘과 기품, 그리고 프란체스카티의 달콤한 톤이 결합한 듯 이상적이었다.
서울시향은 오늘 오후 8시에도 롯데콘서트홀에서 같은 프로그램으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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