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주역으로 파리 공연 마친 모나코왕립발레단 안재용

입력 2018-06-17 06:01  

[인터뷰] 주역으로 파리 공연 마친 모나코왕립발레단 안재용
지난달 주역급 '퍼스트 솔리스트' 올라…입단 두 시즌만에 초고속 승급
파리 공연서 상대역 팔꿈치에 맞아 코피 터져…카롤린 공주 "안재용 괜찮냐"
"카리스마 넘치지만 친근한 거장 마이요…평등하고 열린 분위기 속에 매일 성장"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세계적인 발레단으로 꼽히는 모나코 왕립 몬테카를로발레단(Ballets de Monte-Carlo)에서 주역급 무용수로 활동하는 안재용(26)은 밝고 낙천적인 기운을 가득 품고 있었다.
며칠 전 '한여름 밤의 꿈'(Le Songe)의 주역인 요정의 왕 오베론으로 보여준 관능적이고도 강렬한 마성의 매력과 달리 분장을 지운 그는 꿈 많고 순수한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발레의 역사, 고전발레와 컨템퍼러리 발레의 차이 등을 얘기할 때는 해박한 지식과 무대 위에서와 같은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주역급 '퍼스트 솔리스트' 발레리노인 안재용을 지난 14일(현지시간) 파리의 오페라극장 앞 카페에서 만났다.
셰익스피어의 극을 재해석한 '한여름 밤의 꿈'의 파리 공연 마지막회 리허설을 몇 시간 앞두고 있었는데 이마 한쪽 피부가 붉게 변한 것이 눈에 띄었다.
"피부가 약해서 분장용 가발을 벗고 나면 꼭 이래요."
안재용을 만난 카페 바로 앞 오페라극장(팔레 가르니에)은 그가 한때 꿈꿨던 프랑스 국립 파리오페라발레단의 근거지다.
클래식 발레로 정평이 난 오페라발레단과 달리, 그가 소속된 몬테카를로는 거장으로 꼽히는 안무가 장크리스토프 마이요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주로 하는 실험 정신이 매우 강한 집단이다.
1932년 결성된 이 발레단은 해산과 재창단을 거듭하다 1985년 발레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영화배우 출신 왕비 그레이스 켈리에 의해 왕립발레단으로 재건됐다.
전 세계에서 다양한 배경의 무용수들이 모여 마이요의 지도 아래 평등하고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새로움에 도전하고 성장해가는 그 자유로운 정신이 그는 너무 좋다고 했다.
이 발레단은 '한여름 밤의 꿈'을 최근 에펠탑 바로 맞은편 프랑스 국립샤이요극장 무대에 올려 까다로운 파리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번 공연은 안재용이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주역급인 '퍼스트 솔리스트'로 지난달 '초고속' 승급한 이후 첫 공연이기도 하다.

-- 어제 공연은 잘했나.
▲ 카롤린 공주(모나코 국왕 알베르 2세의 누나)가 파리까지 공연 보러 왔다. 그래서 좀 더 긴장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공연 도중 상대역 팔꿈치에 맞아 코피가 터졌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고 앞줄 관객들은 피가 솟구치는 것도 봤을 거다. 겨우 1막을 마치고 응급처치를 하는데 캐롤라인 공주가 마이요와 함께 와서 괜찮으냐고 묻기도 했다. 그래도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 카롤린 공주라면 그레이스 켈리의 큰 딸인데.
▲ 그레이스 켈리 왕비가 오면서 모나코발레학교를 만들었고 우리 발레단도 새롭게 탄생했다. 그레이스 왕비도 어린 시절 발레를 해서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 카롤린 공주는 장크리스토프 마이요 단장을 안무가에서 단장으로 발탁한 분이기도 하다.


-- 마이요는 현대 발레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사람인데 실제로는 어떤가.
▲ 판단이 확실한 분이다. 리허설 때 못하면 바로 지적하고 부족한 점은 명확히 말해준다. 리허설 때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못하면 호통도 치지만, 잘하면 바로 칭찬을 많이 해준다. 분명히 얘기해주니까 오히려 편하다. 저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런 고민이 없다. 평소엔 단원들과 장난도 많이 치고 아주 친근하다.
마이요는 예쁘고 우아한 것이 아니라 직설적인 감정 표현과 현실에서 말하는 듯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강조한다. 항상 하는 말이 "영화처럼 춤추라"다. 그래서 시네마 발레라 하기도 한다.
-- 고전발레는 잘 안 하는 것 같은데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스타일이 본인과 잘 맞나.
▲ 우리는 유럽에서 가장 트렌디한 안무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단장 본인이 안무가인데, 신진 안무가들을 초빙해 신작의 세계초연도 많이 한다. 많은 발레단이 고전을 열심히 이어오고 있는데 우리는 현대 발레를 이끌어가는 것 같다. 시대가 지나면서 새로운 고전이 필요해지면 우리 발레단의 작품이 고전이 되지 않을까.
사실 전에는 파리 오페라발레단 입단이 꿈이었다. 그런데 김용걸 교수님(한국예술종합학교)이 몬테카를로발레단을 추천했다. 원래 고전발레도 좋아했지만, 연기와 감정 표현이 좀 더 자유로워 보이는 드라마 발레를 특히 좋아했다.
이곳에 와서 다양한 현대 발레를 하면서 시야가 많이 넓어진 것 같다. 모나코가 작은 나라인데도 댄스포럼을 열고 안무가들도 많이 초청하는 등 항상 새로움을 갈망하는 분위기다.
-- 최근 발레단의 퍼스트 솔리스트로 승급했는데. 입단 두 시즌 만에 초고속 승진인데.
▲ 그렇다고 한다. 나도 놀랐다. 어느 날 리허설을 끝내고 땀범벅이 돼서 나오는데 마이요 단장이 엘리베이터를 잡아놓고 사무실로 올라가자고 하더라. 별거 아니니 서류에 사인 하나만 하라고 해서 가서 보니 승급 서류였다.
-- 보통 시즌 끝나고 무대에서 단장이나 안무가가 승급을 깜짝 발표하고 다른 단원들이 모두 축하해주는 것 아닌가.
▲ 몬테카를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좀 평등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다. 발레단 홈페이지 무용수 프로필에도 직위가 나오지 않는다. 그냥 남자무용수/여자무용수로만 쓰여 있다. 직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주역급이라고 주역만 맡지도 않고 코르드발레(군무)라고 해서 군무만 하지도 않는다. 나 역시 첫 시즌에서 '한여름 밤의 꿈' 주역 오베론을 맡았다. 주역인지도 모르고 리허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부랴부랴 원작 찾아 읽고 공부하고…이런 게 우리 발레단의 매력이다.
-- 발레를 아주 늦은 시기인 고2 때 시작했는데.
▲ 어려서는 성형외과 의사가 되어서 사고로 얼굴이 망가진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고1 때쯤 성악을 전공한 누나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니 발레를 추천했다. 그때만 해도 남자가 무슨 발레냐고 했는데 누나가 던져놓고 간 '백야' DVD를 앉은 자리에서 세 번을 돌려본 뒤 발레리노의 꿈을 가졌다. 워낙 운동을 좋아했지만,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다. 서양 친구들은 아무리 늦어도 열 살 전에 발레를 시작한다. 내가 고2 때 시작했다고 말하면 다들 안 믿는다.


-- 발레단이 개방적인 분위기라고 했는데 동료들과는 잘 지내나. 언어 소통의 어려움은 없나.
▲ 발레단원들이 다 친구다. 연습시간 말고도 함께 어울려서 해변에서 수영도 하고 밭에서 딴 신선한 올리브로 함께 요리하기도 하고. 다양한 국적과 배경이라 서로에게 배우는 점이 많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다른 발레단에서 주역급 솔리스트를 하던 사람들이라 경험이 풍부하고 다양한 작품들을 했다. 동료의 조언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된다. 입단했을 때 텃새 같은 것도 없었다. 내가 발레단에서 세 번째로 어린데 나를 다들 '베이비'로 부른다.
다국적 발레단이라 그런지 영어로 주로 소통하고, 모나코가 프랑스어권이라 발레단에서 제공하는 불어 교습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여가에는 가급적이면 발레를 생각하지 않고, 친구들과 미술관을 많이 다니고 다른 레저 활동을 하면서 철저하게 쉬는 편이다.
-- 본인 말고도 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 무용수들이 많다.
▲ 몬테카를로발레단은 해외 투어가 많은데 가는 곳마다 그곳의 발레단에 한국 무용수들이 있다. 그것도 거의 다 주역급 솔리스트들이다. 해외공연을 가면 꼭 만나 서로 고민도 나눈다. 파리에도 학교 선배인 박세은 누나(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 제1 무용수)도 있고. 어디를 가든 한국인 무용수가 중요한 자리에 있으니까 내 동료들도 신기해한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무척 자랑스럽다.
-- 파리 공연에서 기자의 옆에 앉은 노년의 여성분이 '한여름 밤의 꿈'을 크게 웃으면서 무척 신나게 관람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 유럽 관객들은 발레를 가볍게 보러와서 부담 없이 즐긴다. 공연장 가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한국도 발레 공연이 저변화되면 좋겠다. 모나코에서 은행에 갔을 때 옆에 있던 할머님이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와서 공연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한국에서 아주머니들이 주말 연속극을 보고 화제에 올리듯이 모나코에서는 발레가 시중의 화제가 된다. 우리도 그렇게 되면 무용수로서 좋겠다.
프랑스 출신인 마이요의 작품에는 프렌치 코드가 많이 녹아있어서 불어권에서 더 좋아하는 것 같다.
-- 앞으로 목표는.
▲ 일단 우리 발레단의 에투알(최고 수석무용수)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에투알이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일단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싶다. 다양한 안무가들의 작품들을 최대한 많이 해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클래식 발레의 왕자 역할이 아닌, 현실에 있음 직한, 고독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요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런 왕자가 되고 싶다. 내년에 한국 공연도 예정돼 있는데 우리나라 관객분들에게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다.
yongl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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