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환의 농경문화, 노랫소리로 재현하다
(증평=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산업화, 정보화 시대를 거치는 동안 농촌사회가 급격히 쇠락했다. 이농이촌(離農離村)과 함께 세대 불균형 현상까지 심화하면서 전통 농경문화는 생활 속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들어졌다. 증평들노래축제는 사라져 간 애환의 농경문화를 재현·계승해 눈길을 끈다. 올해 축제도 시공을 넘어 모두가 두레 문화와 예술 공연으로 하나 되는 프로그램들로 알뜰히 꾸려졌다.
"덩더 덩더쿵! 덩더 덩더쿵! 덩더 덩더쿵!"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6월 중순의 한낮. 흰색 두레 복장을 걸쳐 입은 풍물패가 날라리(태평소) 소리를 앞세운 채 완만한 곡선의 논둑길을 걸어가며 신명을 울린다. 두건을 쓰고 짚신을 신은 아낙네들도 덩실덩실 춤추면서 북소리, 장구소리, 징소리 요란한 풍물패를 뒤따른다.
풍물단의 길 놀이와 들 나가기에 초목들도 덩달아 신바람이 났는가. 은빛 햇살을 받은 풀잎과 나뭇잎들은 건듯 부는 바람에 흔들흔들 춤춘다. 못자리의 볏모들도 흥에 겨웠는지 잔물결처럼 살랑살랑 일렁인다. 축제는 삼보산 기슭의 둔덕마을 들녘에서 이렇게 서막을 올렸다.
이어지는 화평 기원제. 성황당이 있었다는 수령 280여 년의 느티나무 고목 아래에 큼직한 수박과 고사떡이 차려진 가운데 참가자들은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경건히 기원했다. 초여름의 밤꽃 향기는 오늘따라 진하게 콧속을 파고든다.
"천신지신, 이 세상을 관장하시는 모든 신께 고하나이다! 장뜰들노래보존회 회원들이 뜻과 마음을 모아 증평들노래축제를 준비하였사오니 부디 축제 기간 내내 모든 사람들 무탈하게 하옵시고 축제를 찾아주시는 관람객들에게 만복을 가득 내려주시옵소서!"
◇ 전통과 현대, 그 아름다운 만남
대표적 들소리 잔치인 '2018증평들노래축제'가 지난 6월 16~17일 충북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 2구의 증평민속체험박물관 일원에서 열렸다. 증평군이 주최하고 증평들노래축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전통과 현대, 그 아름다운 만남' 주제의 이번 축제에는 농경문화 체험과 각종 공연·시연·경연·전시 행사가 풍성하게 마련됐다.
무엇보다 눈길을 모은 건 장뜰두레농요보존회가 시연한 장뜰두레농요였다. 이 농요에는 증평의 드넓은 장뜰에서 농민들이 두레 활동을 하며 농사일의 고단함을 잊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일상이 담겼다. 길 놀이, 들 나가기, 기원제는 물론 보리 베기, 보리 타작, 모찌기, 모심기, 김매기 등의 과정에서 풍장(풍물놀이)과 함께 농요가 펼쳐져 농민들의 시름을 덜어줬다.
농촌생활을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 또한 다채로웠다. 묶음 볏모를 멀리 내던지는 모첨 던지기를 비롯해 감자 캐기, 물고기 잡기, 우렁이 잡기 등이 참가자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선사했다.
민속체험박물관의 두레관 앞 잔디마당에서는 국악을 중심으로 다양한 무대가 줄줄이 이어져 감동을 안겼다. 효(孝) 콘서트 국악한마당, 한별이와 함께 떠나는 음악 여행, 영동 난계 국악단 특별공연, 사랑의 퓨전 음악회, 증평 스타 콘서트 등이 그것이다.
전국시조경창대회, 전국국악경연대회, 전국사진촬영대회 같은 경연 프로그램도 한옥체험관과 두레관 등에서 진행돼 축제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더했다. 이와 함께 삶의 고난을 재현한 '증평 애환의 아리랑 고개'와 풍류 문화를 한 마당에서 보여준 '황진이와 곡주 한 잔'은 관람객들로부터 각별히 주목받았다.
증평들노래축제는 2004년 처음 열려 올해로 14회째를 맞았다. 장뜰두레농요보존회와 한국예총 증평지회가 각각 개최하던 '장뜰두레축제'와 '증평예술제'를 2011년 통합해 두레놀이와 예술문화를 양대 축으로 진행하고 있다. 농경문화의 본고장에서 그 생활을 몸소 체험하며 전통예술도 함께 즐기게 하는 것이다.
◇ 아득한 옛일, 어제 일처럼 재현
"왔나?" "왔지!" "왔으면?" "때리고!"
둔덕마을 들판의 오두막집 앞 공터에서는 베어낸 보리를 타작하느라 바빴다. 잠방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두 농부는 바싹 마른 보릿단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도리깨를 힘껏 내리쳤다. 한 사람이 "왔나?" 하고 앞소리를 메기면 맞은편 사람이 "왔지!" 하며 후렴으로 받았다. 이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흥이 돋워지고 보리 낱알들은 멍석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타작 마당을 에워싼 방문객들은 감회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증평읍 주민인 정장순(65) 씨는 "딸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저렇게 도리깨질을 직접 해봤다"며 "농요를 들으며 오랜만에 타작하는 모습을 보니 아득한 옛일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말했다. 보리 타작 장면을 바라보던 모태진(72·증평) 씨도 "무더운 날에 보리를 베어 타작하는 게 힘든 작업이었다"면서 "그래도 새참으로 막걸리 한 잔 걸치고 나면 그 피로를 단숨에 잊을 수 있었다"고 얼굴에 뭉클한 웃음을 올렸다.
이번에는 감자 캐기 현장. 호미를 든 참가자들은 각기 주어진 밭이랑에서 감자를 캐느라 신바람이 났다. 참가비 5천원에 맘껏 감자를 캐서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호미질할 때마다 흙에서는 크고 탐스러운 감자들이 줄줄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참가자들은 횡재라도 한 듯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참가자 진영애(64·증평) 씨는 "참가비를 뽑고도 몇 배나 남을 만큼 감자를 풍성하게 캐갈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나 다름없죠 뭐"라며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감자를 캐던 김민결(9·청주) 양도 "해마다 와요. 느낌이 참 좋아요"라면서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다음으로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한 김매기 현장으로 가보자. 10여 명의 풍물패가 논둑에서 신명을 울리는 가운데 커다란 삿갓을 쓴 농부들은 무논에서 허리를 굽힌 채 부지런히 김을 맸다. 그리고 상호 간에 소리를 메기고 받으며 피로도 말끔히 씻었다.
"잡풀도 많고 곱풀도 많네/ 홍게 방게가 논다/ 참방게도 너무나 많은데/ 홍게 방게가 논다/ 요리조리 손을 맞추어/ 홍게 방게가 논다/ 말끔히나 훔쳐주소/ 홍게 방게가 논다"
농부들은 세 번째 김매기인 세듭매기 시연을 끝낸 뒤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 "야!" 하는 환호성과 함께 하늘 높이 던져 올렸다. '오늘 농사일을 잘 끝냈다'는 신명풀이의 한바탕 놀이판. 이에 뒤질세라 풍물패가 천지사방을 또다시 쩌렁쩌렁 울리며 신바람을 더했고, 논 가장자리에서 카메라 초점을 맞추던 수백 명의 사진작가는 일제히 셔터를 눌러댔다.
◇ 축제로 발전한 '장뜰두레농요'
증평이 두레농요의 고장이 된 데는 그 나름의 자연적·역사적 배경이 있다.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작지 면적이 충북 전체의 평균치를 훨씬 웃돌 만큼 넓다. '넓은 들'로 해석되는 '장뜰' 지명이 통용된 이유다. 현재의 증평읍 장평(莊坪) 일대를 지칭하는데 이곳 도안뜰과 질벌뜰을 중심으로 농사와 관련된 노동요가 발달했고 이게 대대로 전승돼 오늘날의 장뜰두레농요로 자리 잡았다.
두레는 원시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노동 공동체 조직이다. 전통적 농촌마을에서는 두레를 통해 농사일의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고 고단함도 덜었다. 농사일을 할 때 마을 사람들이 풍물놀이를 하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두레 농요. 이런 전통을 장뜰두레농요로 다시 만날 볼 수 있는 것이다.
두레농요는 고리질 소리, 모찌기 소리, 모내기 소리, 초듭매기 소리, 이듭매기 소리, 세듭매기 소리, 보리타작 소리, 보리방아찧기 소리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된다. 선창자가 메기는 소리를 하면 후창자가 받는 소리로 따라가는 교창(交唱) 형식. 장뜰두레농요는 전국의 들노래 중 보기 드물게 축제로 발전해 의미를 더한다.
그중 하나가 모찌기 소리다. 모를 심기에 앞서 모판에서 모를 뽑아내며 농부들은 노래했다.
"여보시요 농부님들/ 모낼 계절 돌아왔네/ 농사 중의 첫 농사가/ 모찌기 농사 첫 농사라/ 오늘 찌는 모판은/ 한 섬지기 모판이라/ 농사 중에 가장 큰 농사가/ 쌀농사가 제일이라"
모내기 소리에선 신명과 함께 애절함도 묻어난다.
"호박은 늙을수록 때깔이 나지만/ 사람은 늙을수록 볼품이 없네/ 세월이 가려거든 저 혼자나 가지/ 아까운 이내 청춘 왜 데리고 가나"
축제 이틀째 한옥체험관에서 진행된 '증평 애환의 아리랑 고개'는 굴곡의 현대사에서 겪었던 이 지역의 아픔이 새겨져 애잔함을 더했다. 아파트 건축으로 지금은 사라진 증평의 아리랑 고개는 천연두 등 각종 병마로 죽어간 이들의 뼈아픈 사연이 '상여소리' 등으로 남아 있다.
"실낱같이 약한 몸에/ 태산 같은 병이 드니/ 어허 어허하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부르느니 어머니요/ 찾느니 냉수로다/ 어허 어허하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충북민요보존회의 이날 시연에서는 물레질 소리, 디딜방아 찧는 소리, 모시 꼬기 소리, 베짜기 소리 등도 두루 감상할 수 있었다.
◇ 축제 분위기 띄운 '선비춤·기생춤'
이번 증평들노래축제에서는 두레농요와 더불어 다양한 공연과 시연, 경연 프로그램이 마련돼 풍성함을 더했다.
그중 하나가 축제장의 초가집에서 연출된 '황진이와 곡주 한 잔'. 네 칸짜리 초가의 마루에서 대금 독주가 이뤄지는 가운데 갓과 도포 등 선비 차림의 출연자들은 한량무(선비춤)로 분위기를 한껏 고무시켰다. 이와 함께 쥘부채와 쪽 찐 머리 등 기생복 차림의 여성 출연자들도 교방무(기생춤)를 추며 흥을 돋웠다.
같은 날 두레관을 중심으로 진행된 전국국악경연대회는 판소리, 기악, 성악, 무용, 타악 등 6개 분야에 걸쳐 멋진 소리의 경연을 벌였다. 경연에는 미국인 가야금 연주자인 조세린 클락(48) 배재대 교수도 참가해 '방아타령'을 산조로 연주했다.
홍성열 증평군수는 올해 축제에 대해 "들노래 중심의 농경문화를 축제로 승화시켜 매년 개최하는 유일한 사례"라면서 "들노래축제가 군민의 화합을 도모하고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공감을 안겨주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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