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구조조정 '기자 절반 줄이기도', 질 저하→부수감소 악순환
'신문의 질'에 영향없도록 그룹 사옥 없애 성공한 사례 눈길
(서울=연합뉴스) 이해영 기자 =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것으로 평가받는 지방신문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신문사 경영권을 장악한 투자펀드들이 저널리즘의 이념을 무시하고 수익지상주의를 내세우며 가혹한 구조조정을 밀어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기자들이 지면을 통해 자사가 겪는 수난을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사례도 나오기 시작했다.
21일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퓰리처상을 9번이나 받은 명문 지방지 '덴버 포스트'(콜로라도주)에 지난 4월 충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2013년 촬영한 편집국 단체사진에서 해고 등의 사유로 회사를 떠난 사람들의 얼굴을 검게 처리한 사진이다. 남은 사람은 5년전 사진속 인물의 3분의 1 정도였다. 덴버 포스트는 사진게재와 함께 이런 사정을 사설로도 다뤘다.
소유업체이던 신문 체인이 2010년 파산하면서 이 신문을 인수한 미디어기업 '디지털 퍼스트 미디어(DFM)'의 모기업인 헤지펀드 'AG'가 가혹한 감원을 강요했다.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법조와 교육 등을 취재할 여력이 없다. 이제 한계에 왔다"
덴버 포스트에서 32년간 기자로 일해온 킬런 니콜슨이 긴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앞날이 걱정돼 회사를 떠나는 기자들도 속출하고 있다.
AG로 경영권이 넘어간 직후 시대변화에 맞춰 전국 뉴스를 내보내는 거점을 뉴욕에 개설하기도 했다. 기자들이 동영상을 제작해 내보내기도 했지만 성과가 나지 않자 2014년부터 가혹한 경비절감이 시작됐다. 근무방식을 효율화하고 기자의 업무부담을 늘리는 방식으로 얼마간 버텼지만 2000년대 중반 300명 선이던 편집국 인원이 현재는 70여명으로 대폭 줄었다. 취재인력 감소는 신문의 질 저하로 이어져 구독자수도 덩달아 크게 줄었다. 2012년 40만부이던 발행부수는현재 17만부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DFM은 산하 신문이 155개가 넘는다. 덴버 포스트만이 아니라 산하 대부분의 신문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이스트베이 타임스'는 지난 7년간 인원을 55%나 줄였다. 이 신문의 조지 켈리 기자는 "지역주민이 필요로 하는 취재를 할 수 없어 사기가 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뉴욕주 킹스턴에 있는 지방지 '데일리 프리먼' 기자인 패트리셔 드키시는 열 몇명이던 기자가 4명으로 줄어 전화취재로 끝내는 일이 많아 졌다고 털어 놓았다. 뉴욕주는 겨울 추위로 유명하지만 사무실에는 난방도 없다고 한다.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지방신문이 시청 등 말단 행정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 왔다. 시 단위의 활동을 취재하는건 현지 지방지밖에 없는 지역이 대부분이다. 지방지가 없어지면 시 재정운영이 방만해지는 등의 폐해가 있다는 보고도 있다. 드키시 기자는 "펀드는 보도의 질이나 지역에 대한 공헌 등은 안중에 없고 이익만 생각한다"며 분개했다.
미국 지방신문을 잘 아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페니 뮤즈 애버나시 교수에 따르면 투자펀드들은 2010년께부터 신문사를 잇따라 사들였다. 금년 5월 현재 보유신문수 상위 10개사 중 5개사가 펀드 계열이다. 미국 전국의 일간지와 주간지 7천310개 중 이들 5개사가 보유한 신문이 884개에 이른다.
신문사 인수 시세는 전에는 영업이익 13년분에 해당했으나 금융위기 이후에는 2-3년분으로 낮아져 단기간에 투자금 회수가 가능해 졌다고 한다. 2007년 약 5천만부이던 미국 전역의 일간지 부수는 작년에 3천만부로 떨어졌지만 비용을 절감하면 충분히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투자매력은 오히려 커졌다는게 애버나시 교수의 설명이다.
미디어 업계사정에 밝은 연구자 켄 닥터는 DMF가 작년에 약 1억6천만 달러(1천773억 원)를 벌어들여 이익률이 미국 주요 신문을 웃도는 17%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AG의 처사가 특히 가혹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철저한 비용절감 추구는 펀드계 언론사 모두 마찬가지다.
애버나시 교수는 "펀드는 주주만 중시한다"면서 "비용절감만에만 치중하고 장기전략을 고려하지 않는 투자는 뉴스의 질과 양을 떨어뜨린다"고 비판했다.
지방지를 재건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펀드계 신문보유회사인 트롱크 산하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인원감축과 트롱크에 의한 편집개입으로 혼란을 겪었지만 외과 의사 출신 중국계 사업가 패트릭 순 시옹(65)이 지난 18일 이 신문을 5억 달러(약 5천541억 원)에 인수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갖춘 저널리스트를 편집국장으로 임명, 재건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덴버 포스트에 대해서도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는 존 와이즈씨 등이 "지역사회를 위한 현지 경영 신문이 필요하다"며 인수를 추진하자 뜻을 같이하는 10명이 1천만 달러의 출자를 약속했다. 와이즈씨는 덴버 포스트 인수와 재건에 약 1억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신문 사업에만 전념하는 새로운 그룹도 출현했다. 120개지(紙)를 소유하고 있는 미국 4위의 애덤스 퍼블리싱과 15위(51개지)인 AIM미디어 등이 그런 곳이다. AIM은 그룹 본사를 두지 않는 등 신문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비용절감을 추진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앞으로 이런 기업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한편 보유지(紙) 448개로 미 전국 1위인 '게이트하우스 미디어'는 일본 소프트뱅크 계열회사라고 아사히(朝日)가 전했다.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포트리스투자그룹(Fortress Investment Group LLC)이 게이트하우스의 모기업이다. 소프트뱅크는 포트리스사 업무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돼 있지만 일본 기업이 미국 지방지를 간접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lhy501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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