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신영 기자 = '풍운의 정치인'이란 별칭이 웅변하듯 작고한 김종필(JP) 전 총리의 일생은 한국정치사처럼 파란만장했다.
JP만큼 한국정치사에서 부침과 영욕이 교차한 인물은 드물다.
권력의 심장부에 있다가도 하루아침에 유랑길로 내몰렸고, 정치탄압으로 숨죽였다가도 다시 화려하게 재기했으며, 여와 야를 넘나들었다.
좋게 평하면 "전후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안목 있는 정치인이자 최초의 정권교체를 주도하여 민주화에도 기여한 킹메이커"였고, 나쁘게 보자면 "쿠데타로 한국의 민주화를 지체시키고 독재를 강화했으며, 3당합당으로 한국정당정치의 대퇴행을 가져오고 지역주의를 선동하여 권력을 연장한 기회주의적 처세의 달인"이었다.
JP는 무엇보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더불어 '3김 시대'를 지탱한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두 전직 대통령과 달리 그는 끝까지 정권의 2인자로 남았다.
2인자였기 때문에 시련이 많았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드라마 같은 정치역정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JP에게 붙은 '굴신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호칭이나 "연작이 홍곡의 뜻을 어찌 알리요"라는 언급은 무리하지 않은 채 순리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2인자 운명의 흔적이었는지도 모른다.
1926년 1월7일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JP는 서울대 사대 2학년 때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가세가 기울자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1960년 중령이던 그는 육사8기 동기생들과 함께 3.15 부정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 등의 퇴진을 주장하는 정군운동을 일으켰다가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이 사건은 그가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는 길로 이어졌다.
35세 때인 1961년 그는 5.16쿠데타로 현대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당시 박정희 소장과 그의 '혈연'은 5.16쿠데타를 계기로 최고통치권자와 2인자라는 동지 이상의 운명으로 발전했다.
JP의 앞날은 1961년 중앙정보부를 창설, 초대 부장에 취임하고 이어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할 때까지만 해도 탄탄대로인 듯 했다.
그러나 창당 과정에서 증권파동 사건,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연루되어 19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으로 첫 번째 외유길에 오른다.
그러나 곧 귀국해 같은 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됐고 이어 공화당 당의장에도 임명되는 등 정치 무대의 전면에 데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외교 파동이 발목을 잡았다. 1962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해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뒤늦게 공개되면서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2차 외유로 내몰린 것이다.
그는 2년 뒤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으나, 대권을 노리고 전국적인 사조직을 만들었다는 '농민복지회 사건'으로 1968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며 야인으로 밀렸다.
JP는 유신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양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5공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그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쫓기듯 떠나는 신세가 됐다.
JP는 1986년 귀국했다. 그리고 서슬 퍼런 5공 정권하에서 호텔 방을 옮겨 다니며 비밀리에 옛 공화당 세력을 규합,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이듬해 당시 양김으로 불렸던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대선에 출마해 정치적 비상을 보여줬던 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 확보, 정치 일선에 복귀하며 다시 일어섰다.
JP는 야당을 이끄는 듯했다. 그러나 1990년 1월 '3당 합당'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반전시켰다. 여권으로 옮겨온 그는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2인자로 자족했다.
민자당 최고위원에 이어 당대표까지 맡으며 JP는 여당을 이끌게 됐지만 순탄치 못했다. 당내 견제와 계파 갈등이 그를 따라다녔다. 1994년엔 민주계를 중심으로 JP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됐다.
탈당한 JP는 자신이 창당한 자민련이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선전하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50석으로 원내 입지를 구축하자 다시 에너지를 얻었다.
여세를 몰아 1997년 대선에 나섰다. 그러나 '여야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전격적으로 후보 단일화에 합의, 결정적인 순간에 김대중 후보에게 힘을 보탬으로써 또다시 '킹메이커'에 머물렀다.
뒷심 없이 물러선다는 인상을 줬지만, 그 선택은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시켰다.
그해 대선에서 김 후보의 당선으로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이 출범하자 JP는 두 번째 총리직이자 새 정부의 초대 총리에 오르며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분점하는 '슈퍼파워'를 과시했다. 한동안 그의 정치인생이 다시 꽃피는 듯했다.
그러나 공동정권의 한 축으로 말년에 전성기를 누린 JP의 정치적 입지도 2000년 2월 DJP 연대가 파기되면서 급격히 약화하기 시작했다. 자민련은 2000년 16대 총선에선 17석, 2004년 17대에서는 4석을 얻는 초미니 정당으로 쇠락했다.
특히 17대 총선에서 JP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추진에 가담, 역풍을 맞으면서 재기불능의 상태로 몰렸다. 9선(제6,7,8,9,10,13,14,15,16대)에 더해 10선을 꿈꿨으나 최악의 성적표로 비례대표 1번인 자신조차 낙선하는 수모를 겪었다.
JP는 정치적 고비마다 '올인'의 승부수를 던졌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달리 늘 장고(長考)하면서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김영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그가 평생 숙원처럼 말했던 내각제 실현은 미완의 과제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보수정객을 자임하는 그에게 설 자리를 주지 않았다.
JP는 17대 총선 참패 후 사흘간 청구동 자택에 머물다가 2004년 4월 19일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나름대로 재가 됐다"고 술회하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구름이 노니는 정원'(운정)이라는 의미를 담은 그의 아호처럼 풍운아로서, 인문학적 교양을 지향하고 예술을 사랑하던 로맨티스트 정객으로서 세상에 왔다가 역사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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