쐐기골 손흥민·선방쇼 조현우·육탄방어 김영권 등 독일전 승리 이끌어
(카잔=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약속했던 '통쾌한 반란'은 없었지만 막판 '짜릿한 반전'은 있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 승리는 랭킹 57위가 세계랭킹 1위를 꺾었다는 사실은 물론 후반 추가시간에 바꾼 극적인 승부라는 점, 첫 경기 졸전 이후 비난 속에 만들어낸 승리라는 점 등 극적 요소를 고루 갖춘 반전이었다.
반전 드라마 뒤에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지닌 태극전사들이 있었다.
◇ 눈물의 의미 바꿔놓은 '울보 에이스' 손흥민
특급 주연 중 한 명은 손흥민(토트넘)이다.
한국 축구 대표팀의 명실상부 에이스인 손흥민은 멕시코전에 이어 독일전에서도 한 골씩을 뽑아내며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지막 독일전에서는 부상한 기성용(스완지시티)을 대신해 주장 완장도 찼고, 경기 전과 경기 도중 그라운드에서 선후배들을 격려하며 분위기를 다잡았다.
4년 전 막내로 나간 브라질 월드컵에서 1무 2패로 쓴맛을 본 후 눈물을 펑펑 쏟아냈던 울보 손흥민은 독일전 승리 이후엔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눈물을 흘렸다.
에이스의 무거운 부담감을 어깨에 지고 러시아 월드컵을 준비하던 손흥민은 대회를 앞두고 "월드컵은 정말 무서운 곳"이라거나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망신만 당할 것"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한 손흥민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자책과 함께 동료들을 향한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뼈아픈 자성의 시간은 효과를 발휘했다.
누구보다 몸과 마음을 다해 월드컵을 준비했던 손흥민은 이긴 독일전뿐만 아니라 진 스웨덴전이나 멕시코전에서도 '역시 에이스'라는 말이 나올 만한 활약을 펼쳤다.
그라운드에서의 몸을 아끼지 않은 활약으로, 그리고 선후배들을 일깨우는 애절한 호소로 대표팀의 투지를 끌어낸 손흥민은 독일전 승리 후 부담감을 함께 나눠준 동료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했다.
◇ 전차군단 막아낸 K리그 꼴찌팀 출신 3순위 골키퍼 조현우
이번 월드컵 세 경기에서 모두 한국의 골문을 지킨 조현우(대구)는 예상치 못한 '깜짝 주연'이었다.
김승규(빗셀 고베), 김진현(세레소 오사카)에 이어 대표팀의 3순위 골키퍼였던 조현우는 첫 경기 스웨덴전에서 장신 공격수를 상대하기 위해 깜짝 기용됐고 눈부신 선방으로 단숨에 존재감을 과시했다.
비록 페널티킥 실점을 허용하긴 했으나 조현우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실점이 나왔을 경기였다.
스웨덴전 선전으로 조현우는 이어진 멕시코, 독일전에서도 골키퍼 장갑을 끼게 됐고, 멕시코전 안정적인 수비에 이어 독일전에서도 몇 차례 슈퍼세이브를 선보이며 경기 공식 최우수선수(MOM·맨오브더매치)로 선정됐다.
조현우는 진부한 신데렐라 스토리의 '흙수저 주인공'과 같은 선수였다.
K리그 최하위팀 대구 소속이던 조현우는 팀의 부진에도 눈부신 선방으로 K리그 팬들을 사로잡으며 스페인 골키퍼 다비드 데헤아에서 딴 '대헤아' '대구 데헤아' 별명을 얻었다.
마침내 신태용 감독의 눈에도 들어 대표팀에 소집된 후 1순위 골키퍼 김승규의 발목 부상 속에 지난해 11월 세르비아 평가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소중한 기회를 놓치진 않은 조현우는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며 결국 이 자리까지 올랐다.
조현우는 "훈련할 때 김해운 골키퍼 코치님이 골키퍼 3명 모두 똑같이 훈련해주셨기 때문에 3순위 골키퍼가 아니라 매 경기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고 말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김병지의 활약을 보고 축구를 좋아하게 됐다는 조현우는 "나도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다"던 월드컵 전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됐다.
그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며 "K리그 돌아가서 좋은 모습을 보인 뒤 유럽에도 진출해 한국 골키퍼도 세계에 나가서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린 선수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K리그 꼴찌팀 골키퍼' 조현우, 월드컵서 떴다 / 연합뉴스 (Yonhapnews)
◇ 몸 던진 수비로 '욕받이'에서 '갓영권' 된 김영권
이번 반전 드라마 주인공들 중에서도 수비수 김영권(광저우 에버그란데)은 '밉상' 비호감 캐릭터에서 단숨에 호감 캐릭터가 된 경우다.
김영권은 신태용 호 출범 초기 가장 고통 받은 선수 중 하나였다.
대표팀의 수비 불안이 이어지는 가운데 김영권을 비롯한 중국파 수비수들은 비난의 중심에 섰다.
주장 완장을 차고 나섰던 이란과의 월드컵 최종예선 경기에는 관중의 환호 탓에 선수들끼리 소통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해서 대표팀 졸전으로 쌓인 대중의 분노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역할을 했다.
국민 욕받이가 되고 대표팀에서도 탈락했던 시련의 시간은 김영권에게 약이 됐다.
정신을 바짝 차린 김영권은 이번 월드컵에서 이를 악물고 몸을 던져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일전에서는 여러 차례 육탄 수비 후 선제골까지 만들어 '갓영권' 찬사를 얻어냈다.
러시아 월드컵이 마치 '김영권 갱생 프로그램'이라도 된 듯한 극적인 활약이었다.
김영권은 지난해 받은 비난이 오늘의 자신에 "많은 도움이 됐다"며 "비난이 나를 발전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밖에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과 중원 사령관 역할을 모두 나무랄 데 없이 수행한 기성용(스완지시티)과 대표팀에 활력을 불어넣어준 '새내기' 이승우(베로나)와 문선민(인천), 그리고 함께 뛰지는 못했지만 벤치에서 힘이 돼준 선수들까지 23명의 태극전사 덕에 국민은 마지막에나마 웃을 수 있게 됐다.
'욕받이' 김영권 "비난이 나를 발전하게 했다" / 연합뉴스 (Yonha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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