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집 '남아 있는 그대들에게' 출간
(서울=연합뉴스) 이한승 김연정 이슬기 기자 = 향년 92세를 일기로 지난달 23일 별세한 '한국 정치의 풍운아'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책 '남아 있는 그대들에게'(스노우폭스 북스)가 2일 출간됐다.
'유언집'이나 다름 없는 이 책은 김 전 총리가 2016년 5월부터 2017년 가을까지 측근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남긴 책이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됐으며, 아내에 대한 그리움, 청년들에게 전하는 위로 등 각종 조언의 메시지,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배경과 정치 철학,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일화 등이 담겨 있다.
◇ 고(故) 박영옥 여사에 대한 애틋한 사랑
김 전 총리는 이 책에서도 부인 박영옥 여사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김 전 총리는 박 여사와의 첫 만남과 연애 시절을 기술하며 "아내의 생일 때마다 마음을 담아 직접 손 글씨로 축하 편지를 썼다. 아내는 제가 준 편지들을 버리지 않고 표구를 해서 모아 뒀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2015년 2월 15일 결혼 64주년을 함께 보내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아내의 임종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며 "마지막 입맞춤을 했고, 선물로 64년 전 아내에게 선물한 결혼반지를 목걸이에 매달아 목에 걸어 줬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여보, 멀지 않은 장래에 갈 테니까 외로워 말고 잘 쉬어요'였다"며 "아내가 마지막 눈을 감으며 내 곁을 떠났을 때, 그야말로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밝혔다.
딸 예리 씨에 대해서는 "대학생이던 1970년대 초반 항상 경호원이 예리를 따라다녀 대학 생활의 꽃이라는 미팅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며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때로 가족 구성원들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며 안타까운 심정도 토로했다.
◇ "정치에 미련을 가진 것은 내각제 소신 때문"
김 전 총리는 자신의 정치관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그는 "역사가 저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총재나 총리의 위치에서 언제나 대한민국을 받들고 있었다"며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조차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 뿐이었다"고 말했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선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 남에게 도움받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는가"라며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던 1950∼1960년대에 경제 발전으로 민생을 안정시킨 다음에 민주주의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 굳은 신념"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5·16 쿠데타에 대해 '군사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정치에 미련을 가졌던 것도 권력욕이 아니라 내각제라는
소신을 이뤄보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었다"며 "소신만 갖고 움직여 왔으나 1인자로부터 항상 견제를 받아 왔고, 그 결과 정치 인생에 부침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골프 애호가'로 알려진 김 전 총리는 "정치는 골프보다 어렵다. 골프는 안 맞는다고 책임질 일은 없지만 정치는 책임이 뒤따른다"며 "잘못하면 국민에게 그만큼 해를 입힌다. 그래서 2004년 4월 아무 말 없이 즉각 정계를 떠났다"고 설명했다.
'만년 2인자'라는 꼬리표에 대해서 "2인자는 성공의 지표이지, 결코 실패의 대명사가 아니다"라며 "수십명이 제 곁에 모이면 반드시 뒤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사람을 모으지 않았다. 조금은 슬픈, 제 삶의 처세술이었다"고 구술했다.
그러면서 "누군들 1인자가 안 되고 싶을까마는 그 마음을 억제하며 인생을 이끌어 온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1인자는 언젠가 그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 숙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 박정희에 대한 애증…"각하, 제가 나세르 입니까"
김 전 총리의 정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만큼 저서 곳곳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애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는 "박 전 대통령 등 청와대 권력자들은 제 주변에 사람이 모이면 저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거나, 제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며 "그 결과 대여섯 번 압수수색을 당했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1968년 5월 30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막상 그만두자 박 대통령이 당황했고, 제 마음을 돌려놓으려 했다"며 "박 대통령은 제가 옆에 있을 때는 권력을 노린다고 의심하더니 없어지자 저를 붙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독대했을 때 저는 대뜸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라고 외쳤다"며 "나세르는 이집트 혁명 뒤 1인자를 제치고 대통령에 오른 인물로, 지독한 견제와 감시에 지쳐 참다 못해 항의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은 지금까지 겪어온 숱한 사람들 중 '비범'에 속하는 사람"이라며 "가난한 우리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 박 전 대통령과 저의 조합이 필요한 측면이 있었다"고 자평했다.
마흔다섯 번째 생일에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들어앉아 있을 때 박 전 대통령이 추위 속에서 피는 귀한 한중매(寒中梅)를 골라서 보내 줬다면서 "우연의 일치라고 넘겨 버리기에는 너무도 암시적이어서 한참 서 있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김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재임 중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처음으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성과를 냈다"며 "한국 최초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대통령이라는 의미있는 기록을 남겼다"고 서술했다.
또 12·12 사태 이후 노태우 당시 보안사령관을 만나 "당신이 2인자인 듯한데 2인자는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아야 한다"며 "품격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때도 2인자다운 논리가 서야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는 이어 "성의를 다해서 일관되게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줘야 하고, 조금도 의심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마지막까지 앙금을 풀지 못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을 당해 임기 중 파면 됐다"는 짧은 언급만 했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 대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히 알아보고 확신이 서야 사업에 손을 대는 스타일"이라고,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 대해서는 "배포와 뚝심이 대단해 '실패해도 할 수 없다'며 덤벼드는 스타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두 사람이 우리나라를 일으킬 것으로 믿었기에 최선을 다해 도왔다"고 말했다.
jesus786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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